국제도시 PART 1. 전입생 따르르르르릉---. 자명종시계가 외쳐댔다. 쥬엘 오스몬드는 침대속에서 웅크린 채 눈을 떴다. 손을 뻗어 자명종 시계의 비명을 멈춘 후 쥬엘은 튀어 일어나 욕실 로 들어갔다. 욕실바닥은 타일이 여기저기 떨어져 나가고 벽은 페인트칠이 벗겨져서 지저분해 보였지만, 그래도 거울은 아직 붙어있었고 물도 잘 나왔다. 양 치질과 세수를 마치고 잠옷 소매로 물기를 슥슥 닦아낸 후 쥬엘은 침실로 돌아와서 커어튼을 열었다. 창밖은 좁은 뒷골목이었지만 약간의 햇빛정도 는 비쳐 들어왔다. 뒷골목 6층짜리 아파트의 6층. 13평짜리 이 아파트에는 방 두개와 부엌 과 거실과 욕실이 알뜰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혼자나 둘이 살기엔 딱 알 맞은 크기다. 비록 그것이 더러운 커어튼과, 한쪽 다리가 부러져 기울어 진 침대, 앉고싶은 욕구를 말끔히 없애주는 소파, 카페트도 깔려있지 않 은 바닥, 낙서로 그득한 벽, 엘레베이터도 없는 건물의 꼭대기층... 등의 자질구레한 것들을 동반한 아파트일지라도, 크기만은 알맞았다. 쥬엘은 침대밑에 놓아두었던 여행가방에서 물빠진 청바지와 체크무늬 난방셔츠를 꺼내어 입었다. 그리고 머리를 빗고는 빗을 뒷호주머니에 찔 러넣었다. 피로가 말끔히 가신 모습이었다. 뉴욕에서부터의 14시간 논스톱 비행 -- 어젯밤 12시가 다 되어서 가까 스로 이 집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쥬엘은 완전히 지쳐있었다. 물론 겉으 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샤워를 하고 침대에 기어들어가는게 고작이었다. 샤워와 수면. 쥬엘은 이 두가지의 위력에 새삼 감탄했다. 그리고 여행 가방속에서 햄버거를 두개 꺼내어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20분 후, 버스에서 내린 쥬엘은 <앨런 사모아 고등학교>라고 씌여진 표 지판의 화살표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곧 웅장한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 다. 쥬엘의 새 아파트 만큼이나 낡았지만 오히려 전통있어 보였다. 잠시 발걸음을 멈춘 쥬엘은 교문 기둥에 씌여있는 학교 이름을 천천히 소리내 어 읽어보았다. 이상한 감흥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나는 앨런 사모아 고등학교의 학생!' 쥬엘은 싱긋이 웃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바로 곁의 수 위실에서 교무실의 위치를 묻고는, 그쪽을 향해 콧노래로 <케세라세라>를 흥얼거리면서 지금부터 시작될 새로운 생활에 대한 호기심으로 약간 가슴 을 설레이면서 걷는 것이다. 쥬엘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앨런 사모아 고등학교 2학년 C반의 담임인 율리아 로렌스는 약간 붉은 색을 띠는 금발머리를 단정히 하나로 묶어 늘어뜨린, 꽤 인상이 차가운 여자였다. 율리아는 금테안경너머로 자기반의 새로운 전입생을 올려다봤 다. 173cm의 쥬엘은 말없이 율리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은 밝았지 만 약간 긴장한 것 같기도 했다. "쥬엘 실버 오스몬드양?" "네." "만나서 반가와요. 난 당신의 담임선생님인 율리아 로렌스예요. 수학을 가르치고 있지요. 아, 거기 앉아요." 율리아는 맞은편을 가리켰다. 쥬엘은 얌전히 앉았다. 그리고, 간단한 학교 소개와 교칙 소개, 그리고 서류에 도장을 찍고 학생증을 받음으로써 전입수속은 끝났다. 파파가 해 놓은 수속은 완벽했다. 쥬엘은 뉴욕의 엘 링턴 고등학교 -- 물론 쥬엘은 그런 학교가 있는지 조차도 모른다 -- 에 서 전학온 걸로 되어 있었고, 특기는 테니스로, 운동선수로서 장학금을 받아 학교에 다녔던 걸로 되어 있었으며, 성적은 전교 10등 내의 최상급. 경영대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되어 있었다. 쥬엘은 미스 율리아 로렌스가 '...하다면서요?', '...라면서요?'라고 묻는 말에 연신 'Yes'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파파가 그렇게 수속을 해 놓았다면 그런 것이다. 이제부터 쥬엘은 아버지와 단둘이 뉴욕에서 살던 최상급 엘리트 학생으 로, 아버지의 전근으로 말미암아 이곳에 오게 되었다는 사연을 가진 자존 심 강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전근했다는 아버지는 며칠후면 교통사고라는 명목으로 죽은 걸로 될 것이었다. 그리고, 기꺼이 앨런 사 모아 고등학교 테니스부에 들어서 운동선수 장학금으로 학교에 다니는 가 난한 학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자존심과 경영학에 대한 열망은 조금도 사그러지지 않은, 그러한 학생으로서 말이다. 낸시 스왈러는 주근깨가 많고 억센 갈색머리를 가진 명랑한 소녀였다. 낸시는 턱을 고이고 자기 옆에 앉아있는 전입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단 히 부드럽고 매끄러워보이는 검은 머리는 아무렇게나 길어서 어깨에 닿 고, 한없이 깊어보이는 푸른 눈은 무엇이든지 꿰뚫어 볼 것처럼 예리하 다.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서 위압감을 주는데다가 어딘가 이지적인 냄새 가 풍긴다. 피부는 약간 볕에 그을어 있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개성을 표 출한 것처럼 아름답다 -- 대충 이러한 것이 그녀가 본 쥬엘이었다. 낸시 는 오늘도 지각을 했기 때문에 쥬엘이 자기 옆자리에 앉아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었다. 지난주 초에 로버트라는 남자애가 전학을 간 뒤로 주욱 비어있던 자리였으니까. '지각을 하지 말껄...' 낸시는 열심히 후회했다. 어젯밤에 <암흑의 도시>를 보지 않고 자는 건 데. 그 영화 벌써 세번이나 본 거잖아. 쥬엘이 나를 상대할 가치도 없는 애라고 생각하게 되는 건 싫은데. 그래, 내일부터는 지각을 하지 말아야 지. 절대로 말야... 쥬엘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자기 소개 외에는. 말을 적게 할수록 실 수할 확률도 줄어드니까. 그러나, 낸시는 대꾸도 않는 쥬엘에게 싫증도 안 나는지 계속 종알댔다. 자신의 주근깨가 몇개인지서부터 자기 엄마 아 빠가 어떻게 만나서 결혼했는지, 교장선생님의 손자가 얼마나 잘생겼는 지, 자기가 그를 왜 좋아하는지까지! "거참 안됐군요. 하지만 자격이 있는지 테스트를 해봐야겠는데요." 앨런 사모아 고등학교 테니스부 코우치 크리스토퍼 프린스는 율리아가 데리고 온 키 큰 여학생을 흘깃 보면서 말했다. 교통사고로 아버지가 돌 아가셨다, 그래서 장학금을 타기 위해 테니스를 한다? "잘 부탁드립니다." 쥬엘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의 죽음때문인지 다소 해쓱해진 느 낌이 드는, 그러나 여전히 건강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자리에서 쥬엘은 입부 테스트를 받았다. 테니스를 무지무지하게 좋아 하는 코우치 크리스토퍼는, 장학금만을 위해 테니스를 치겠다는 쥬엘이 얄미워서 테스트라는 명목으로 초죽음을 만들 기세였다. 그러나 테스트가 2시간여에 걸쳐서 실시되고, 그동안 계속 뛰고 받아치고 공에 얻어맞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쥬엘은 여전히 싱싱했다. 숨도 그다지 가쁘지 않았고, 콘트롤도 정확했다. 재목감이다! 크리스토퍼는 쥬엘의 재능에 놀라면서 내심 기뻐했다. 전국대회 금메달을 다시 한번 손에 쥘 수 있게 될 것이 다. 쥬엘은 유토피아 피렌에게 타월을 갔다줬다. "고마와." 유토피아는 땀을 닦으면서 우아하게 말했다. 땀에 젖은 금발머리가 햇 빛에 반사되어 황금실을 쌓아놓은 것처럼 반짝거렸다. 유토피아에게는 여 왕같은 기품이 있었다. 그녀는 모든 테니스부원, 아니 전교생의 우상이었 다. 입학하고부터 한번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은데다가, 작년과 재작년 에 연이어 전국대회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딴 테니스의 귀재이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 테니스부에 모습을 비치는 건 하루에 두시간 이내로, 그녀 자신은 공부에 더 치중하고 있었다. "유토피아, 당신은 3학년이지요? 졸업하면 무얼 할 거예요?" 쥬엘이 타월을 받아들며 말했다. 눈을 이지적으로 빛내려고 노력하면서. "대학에 가야지. 그게 나의 꿈이고 아버지의 꿈이니까. 옥스퍼드 대학 경영학과에 진학할 거야." "나도 그게 꿈인데!" 쥬엘은 놀랐다는 듯이 외쳤다. 유토피아에 관해선 뉴욕에 있을 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지만, 하나도 모르는 듯이 보여야 한다. 그리고 은근히 유토피아와 가까와져야 한다.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을 사람은 나뿐이거든. 난 외동딸이니까." 유토피아는 동지를 만나 반갑다는 듯이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 회사는 큰가요?" "모르니? 아참, 뉴욕에서 최근에 왔다고 했지. 우리 아버진 안토니오 피렌이야." "안토니오 피렌? 이탈리아 제일의 부자라는? 유럽전체를 현금으로 사버 릴 수도 있을 거라는 피렌 콘체른의 회장 말인가요?" 유토피아는 슬프기도 한 것 같고 자랑스럽기도 한 것 같은 기묘한 미소 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공부할 의욕이 있겠군요! 그 큰 회사를 경영하는 재미를 조만 간 맛볼 수 있을테니 말예요!" "재미?" 유토피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오히려 두려움이라는 게 맞을 거야." 유토피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일어나 기품있는 걸음걸이로 탈의 실을 향해 갔다. 1단계 성공! 쥬엘은 속으로 탄성을 올렸다. 캐더린 피킨즈는 네트를 정리하면서, 다른쪽의 네트를 정리하고 있는 쥬엘을 바라봤다. 캐더린은 쥬엘과 같은 반이었다. 지금까지 두 주일 가 까이 지나는 동안 아무하고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던 쥬엘이 유토피아와 는 그렇게 친한 듯이 이야기하는 걸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자 존심이 너무 강해서 유토피아같은 거물이 아니면 이야기 나누기도 구역질 이 난다는 것일까? 낸시가 그 장면을 봤다면 눈물을 세 양동이는 흘렸을 것이다. 그토록 친절히 대해주는 낸시는 외면하면서! 케더린은 저절로 분 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의 빨간빛 곱슬머리는 분노로 인해 더 붉어진 듯 싶었다. 낸시는 케더린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니까. 네트 정리를 마치 자, 캐더린은 곧장 쥬엘에게로 걸어갔다. 1,2학년이 두명씩 당번제로 돌 아가며 네트정리를 하기 때문에 코우트 안에는 캐더린과 쥬엘밖에 없었 다. "쥬엘 실버 오스몬드!" 캐더린이 냉랭한 목소리로 외쳤다. 쥬엘은 돌아다보지도 않고 못들은 척 탈의실로 걸어들어갔다. 캐더린도 잰걸음으로 쫓아들어갔다. "쥬엘 실버 오스몬드!" 쥬엘은 말없이 캐더린에게서 등을 돌리고 옷을 갈아입고 있을 뿐이었 다. 체크무늬 난방셔츠에 물빠진 청바지로. 그리고는 땀에 젖은 운동복을 비닐봉지에 담았다. "쥬엘!" 캐더린이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쥬엘이 돌아다보았다. "야아, 캐디." 쥬엘은 마치 절친한 친구이기라도 한 것처럼 부드럽게 애칭으로 불렀 다. 그 얼굴에는 유토피아와 이야기할 때보다 백배는 더 다정한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왠일이지? 불러놓고." 캐더린은 할말을 잃었다. 쥬엘이 이렇게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애칭은 고사하고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리라고도 생각지 못했었 던 것이다. "캐디, 그래, 너도 나같은 애와 친해지고 싶진 않겠지. 난 고아에다가 성격도 차갑고..." 쥬엘은 슬픈 듯이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낸시는..." "낸시? 그 애는 누구에게나 그렇게 이야기할 거야. 내가 아니어도 아무 런 상관이 없고, 아니, 커다란 인형이라면 훨씬 더 친절히 대해줄 거야." 쥬엘은 캐더린의 표정이 부드러워지고 그 잡아먹을 듯한 표정이 사라지 는 것을 느꼈다. "캐디, 우리집에 갈래? 형편없지만, 그래도 인스턴트 통조림 몇개쯤은 대접할 수 있으니까." 애써 명랑한 체 하려는 듯한 구슬픈 목소리였다. 캐더린은 자기가 왜 쥬엘을 불렀는가를 까맣게 잊었다. '충분히 이용가치가 있는 아이야. 아파트에의 첫 초대손님으로 적합하 지. 아무에게나 이야기해버리는 낸시처럼 입이 가벼운 것도 아니고.' 쥬엘은 캐더린이 낸시를 위해 무엇이든지 하려고 했듯이, 이제 자신을 위해서도 무슨 일이든 해줄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 중 요한 것은 비밀을 '적당히' 지킬 줄 안다는 거였다. 크리스토퍼 프린스는 아파트 침실에 누워 쥬엘 오스몬드라는 아이를 생 각해봤다. 테니스 솜씨도 수준급에다가 지구력도 놀랄정도였다. 하지만 녀석의 태도는--. 선배나 동료들과는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자신과 도 부원등록을 위한 공식적인 대화를 했을 뿐이었다. 유토피아와는 그래 도 몇마디씩 나누기는 했지만, 그다지 마음이 통하는 것 같아보이지는 않 았다. 분명 여학생인데도 부드럽다기 보다는 뻗뻗한 느낌이 드는 것도 이 상한 일이었다. 아버지와 단둘이 살았기 때문에 그렇겠지, 플레이가 남성 적이라서 그런 거겠지, 하고 생각하려해도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사라지질 않았다. 쥬엘은 마치 우리안에 들어있는 사자를 연상케했다. 무 언가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를, 그러나 조용히 억제하고 있는 듯한 느낌 을 주는 아이였다. 천살 쯤 먹은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그런지도 모르지. 곧 보통의 재잘거리는 여자아이가 될 수 있 을 거야. 크리스토퍼는 그다지 마음에 드는 결론은 아니었지만, 대충 이 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왜 쥬엘에게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이상 하게 생각했다. 어쨌거나, 그는 곧 잠이 들었다. 쥬엘이 전학한 지도 3주일이 되어갔다. 그동안 쥬엘은 대충 학교안의 분위기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테니스 부원은 학교에서 대체로 대접해 주 는 편이었고, 코우치는 거의 우상화 되다시피 했다. 여학생들은 지난달의 발렌타인데이에 90% 가량이 코우치에게 초코렛을 만들어 보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리스 테일러라는 남자 테니스부 주장이 유토피아와 꽤나 가까운 사이로, 작년 재작년 모두 유토피아와 함께 전국대회 금메달을 나 란히 따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환상의 테니스'를 구사한다는 유토 피아의 화려한 기술을 닮았으면서도 힘찬 플레이 때문에 앨런 사모아 고 등학교 내에서는 미스터 유토피아라고 불린다는 그리스 테일러는, 186cm 의 키에 짙은 밤색 머리칼의 보기 좋은 청년이었지만, 어딘가 냉랭한 구 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캐더린 피킨즈는 이러한 모든 사실들을 묻는대로 알려주었다. 쥬엘의 아파트에 가보고 난 캐더린은, 쥬엘이 원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도와주고 싶어했다. 그런 지옥같은 집에서 사는 가난한 쥬엘 을 위해, 그리고 자존심이 강해 도움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 쥬엘을 위해, 캐더린은 매일 햄버거 하나씩을 쥬엘의 책상서랍속에 넣어놓기도 했다. 쥬엘은 앞으로 해야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파파를 만날 수 있으면 좋 을텐데. 얼마나 지나야 파파가 그 다음 해야할 일을 알려줄까? "유토피아, 당신은 경영대에 갈꺼면서 왜 테니스를 치죠?" "너는 왜지, 쥬엘?" "전 장학금 때문이예요. 학교에 다닐 형편이 안되거든요." "난 우리 아버지 때문이야. 우리 아버진, 대 기업가가 되려면 '적어도 한 가지 스포츠와 적어도 한 가지 악기에 관해선 천재적'이어어야 한다며 거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거든." "하지만 당신은 테니스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걸요." "테니스를 좋아해, 물론." "유토피아, 당신 테니스 잘 쳐요?" 유토피아는 이 당돌한 후배를 빤히 쳐다보았다. 전국대회 2연패의, '환 상의 테니스'를 구사하는 유토피아 보고 테니스를 잘 치느냐고? "잘 친다고 해야겠지." "나보다도 잘 쳐요?" 유토피아는 어이가 없었다. 뉴욕에서는 어땠는지 몰라도 여기는 런던이 다. 런던의 고등학생 중에서 둘째간다면 서러워할 유토피아에게 대체 이 아이는 무슨 소릴 하고 있는건가! "나랑 시합해 볼래?" 유토피아는 장난스런 생각이 들어서 말했다. 이 건방지고 당돌한 후배 에게 겸손이란 걸 가르쳐주고 싶었다. "물론 좋아요, 유토피아. 하지만 학교 안에서라면 코우치가 허락하지 않을텐데요." "그렇군. 코우치는 연습시합이란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니까. 내기라 도 건 걸로 아신단 말야. 좋아, 그럼 다른 곳으로 몰래 가서 하지 뭐. 일 요일쯤에." "일요일? 좋아요!" 일요일 아침 10시 런던 동쪽 끝의 <이스턴 실내 코오트>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그들은 마주보며 빙긋이 웃었다. 금요일 오후, 한쪽 손은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 한쪽 손은 가방을 어 깨에다 들쳐 맨 자세로 휘파람을 불며 걸어나오던 쥬엘은 누군가의 억센 손에 의해 검은 리무진 안으로 밀려 넣어졌다. 쥬엘은 소리지르지 않았 다. 두 명 다 검은 양복을 잎고 짙은 곤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는데다가 넥타이 핀의 모양으로 파파가 보낸 사람이라는 걸 쉽사리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쥬엘은 몸을 뒤로 기대고 편히 앉았다. 3주일 동안이나 만나 지 못했어. 영국에 온 이후로 처음 만나는 거야. 왜 그동안 연락이 없었 을까? 그동안 내가제멋대로 캐더린을 끌어들이고 유토피아와 시합을 약속 한 걸 야단치지는 않겠지? 아무래도 코우치와 친해두는 게 좋지 않았을 까? 쥬엘은 옆자리에 앉은 사내의 넥타이핀을 들여다 봤다. 작은 에메랄드 가 박혀있는 은으로 된 수공예품으로, 클로우버 세개를 모아놓은 듯한 모 양을 하고 있다. 뉴욕헤서는 쥬엘도 항상 검은 양복에 곤색 넥타이를 메 고 다녔었다. 그리고 은으로 된 같은 모양의 넥타이핀은 지금도 난방셔츠 의 호주머니에 들어있다. 리무진은 그리니치쪽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한시간쯤 지나자 차는 변두리의 외딴집 앞에서 멈추었다. 변두리의 외딴집 -- 그러나 그건 결코 작은 오두막 따위가 아니다. 대문에서 집 건물까지만도 걸어서는 20분쯤 걸릴 대 저택, 파파의 집이니까. 리무진은 대문을 지나 잠시 후 건물앞에 섰다. 쥬엘은 가방을 어깨에 들쳐메고 차에서 내렸다. 사내들은 다시 차를 타고 아무말없이 사라져 버 렸다. 쥬엘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건물안으로 들어가서 이층을 향해 계 단을 올랐다. 이층에서 왼쪽으로 세번째 방, 거기가 쥬엘의 방이다. 파파 의 집은 세계 어느나라에나 있지만, 모두 다 넓이나 구조가 똑같아서 헤 맬 염려는 없었다. 정원에 심은 나무의 위치며 수까지 똑같았으니까. 쥬엘은 방문을 열았다. 뉴욕에서와 똑같은 구조였다. 카페트도 깔리고 침대에 커튼까지 있는 고급 침실. 옷장은 유명 메이커에서 만든 인도네시 아 산으로 왁스가 매겨져 길이 잘 들어있었다. 쥬엘은 옷장 문을 열었다. 검은 양복 다섯벌과 그밖의 옷이 종류별로 들어있었다. 물론 쥬엘의 사이 즈대로, 각 나라에 있는 파파의 집마다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쥬엘은 익 숙한 솜씨로 난방셔츠와 물빠진 청바지를 벗어던지고는 검은 양복을 입었 다. 짙은 곤색 넥타이를 매고 벗어던진 옷의 호주머니에서 넥타이 핀을 꺼내 꽂은 쥬엘은 그 옷들을 옷장속에 던져 넣고 테이블 옆에 놓여있는 빗을 집어들었다. 파파를 만날때는 단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잠시후 쥬엘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파파의 방으로 갔다. 문을 노크하자 "들어와요"라는 감정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쥬엘은 두 짝으로 된 커다란 문을 밀고 들어갔다. 정면에 커다란 책상과, 테이블을 둘러싼 두개의 긴 의자가 보였다. 그리고, 30대 전후로 보이는 옅은 갈색 머리칼-- 햇빛이 비치는 부분은 거의 금발로 보일 정도로 -- 의 키큰 남 자가 창밖을 내다보며 서 있는 게 보였다. 검은 양복을 입은 등이 건장하 고 매끄러워 보이는, 약간 말랐다 싶을 정도로 군살이 없는 남자였다. 물 론 파파의 집을 드나드는 사람은 누구나 그런 체격을 가졌지만. "파파!" 쥬엘이 작게, 그러나 또렷한 목소리로 파파를 불렀다. 옅은 밤색 머리 칼을 가진 사내가 돌아다 봤다. 짙은 밤색의 눈동자가 반가운 빛을 띠고 쥬엘을 바라다 봤다. 쥬엘은 파파에게로 달려갔다. 파파가 쥬엘의 허리를 잡고 위로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게 왠일이십니까? 형편없이 가벼워지셨는데요." 쥬엘은 발이 땅에 닿자 킬킬대고 웃으며 파파의 목에 매달렸다. "파파가 보고 싶으서 살이 빠졌나봐." 저녁식사를 마친 쥬엘과 파파는 다시 파파의 방에서 테이블을 마주 하 고 앉았다. "잘 하셨습니다. 캐더린 피킨즈에 관한 건 곧 조사해서 자료를 보내드 리겠습니다. 그리고, 유토피아와 시합을 하게 되면 절대로 이겨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길 수도 없겠지만." 파파가 쥬엘의 눈을 쳐다보며 빙긋이 웃었다. 쥬엘은 투정을 부리듯이 대꾸했다. "알고 있어. 어차피 이길 생각은 아니었다구." "겁을 듬뿍 줘서 좀 두렵게 하는 것까지는 괜찮겠지요. 아니, 오히려 그게 더 효과적이겠군요. 겁을 줘서 당신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게끔 유 도하십시요." "그렇게 해도, 유토피아가 나를 완전히 믿게끔 될까?" "잠시의 냉전이 오히려 후엔 사람을 더 친밀하게 하는 수가 수두룩 하 지요." "오케이. 그렇게 할께." 파파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일요일 오전 10시라고 했지요? 그때쯤엔 시간이 비니까 제가 가서 응 원해 드릴까요?" "정말야, 파파?" "쥬엘의 눈이 반짝 빛났다." "지는 꼴을 보이는 게 싫다면 안 가겠습니다만." 파파가 놀리듯 말했다. "아, 그런 농담일랑 하지마. 난 지금 꽤나 고민하던 중이었다구." "스스로 자신의 실력을 테스트 해 보는 기분으로 하십시오. 그리고, 자 신있다는 듯이 방글방글 웃어주세요. 유토피아는 긴장하게 될 겁니다. 당 신의 여유를 부러워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자기에게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나에게 뛰어오게 된다, 이런 말이로군." "확실히 당신은 통하는 데가 있군요." 파파가 한쪽눈을 찡긋해 보였다. 일요일 오후, 유토피아는 그리스 테일러와 함께 <이스턴 실내 테니스 코오트>에 모습을 나타냈다. 쥬엘과 유토피아가 예약한 바로 옆 코우트에 서는 파파와 또 한 남자가 9시 30분부터 테니스를 치고 있었다. 유토피아 가 2분쯤 기다리자 쥬엘이 나타났다. "굳 모닝, 쥬엘" "굳 모닝, 유토피아. 아니, 그리스가 왠일이예요?" "내가 심판 봐달라고 억지로 끌고 왔어." 당황한 유토피아가 얼른 대답했다. "굳 모닝, 쥬엘" 그리스 테일러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굳모닝, 그리스." 쥬엘도 따라서 인사를 했지만, 그다지 밝은 목소리는 되지 못햇다. 운 동복으로 갈아입고 나자 그들은 악수를 하고 양쪽으로 갈라서 섰다. 몇구 를 주고 받은 후 그리스가 심판대에 올라가 시합 시작을 선언했다. 쥬엘 은 곁눈질로 파파와 또 한사람의 남자가 땀을 닦으며 벤치에 앉는 것을 봤다. 유토피아의 서어브가 날아왔다. 쥬엘은 힘껏 받아쳤으나 네트에 걸리고 말았다. 그리스 테일러는 소파에 팔베게를 하고 누워있었다. 오늘은 형이 침대 에서 자는 날이니까. "유토피아는 이겼어. 점수 차이가 그다지 크진 않았지만, 어쨌건 이겼 다구. 그런데 왜 그토록 표정이 침울했을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어. 하지만 저 쥬엘이란 녀석은 졌으면서도 태연히 웃고 있었잖아. 마치 자기 가 이긴 것처럼 말야." 그리스는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찌 됐건 간에 이기는 게 제일 인데. 그리스는 늘 이겼다. 유토피아와 나란히 전국대회 2연패를 자랑하 듯이 그는 져 본 일이라곤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미스터 유토피아라고 불릴 만큼 화려한 플레이를 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그는 코우트의 악당 이었다. <그리스 테일러와 시합을 하고 나면 몸에 적어도 서너군데는 멍 이 든다>는 말이 생겼을 정도로 인정사정없이 공을 내갈긴다. 그러나, 늘 이기기 때문에 패자들은 군소리를 못했다. 그리스는 이긴다는 것에 대한 집념이 철저했다. 이겨야 한다, 그래서 환히 웃어야 한다, 라고만 생각해 왔던 그에게 있어서 오늘 있었던 시합 은 정말 이상한 시합이었다. 패자는 웃고 승자는 운다? 이게 무슨 짓이 람. 그리스는 쥬엘이 남자라면 한번 쯤 시합해 보고 싶은 상대라고 생각 했다. "그리스?" 형이 불렀다. 그리스는 벌떡 일어나 침실로 갔다. 형은 침대에 앉아 담 배를 피워물고 있었다. 기능공이라는 직업 때문인지 굉장히 피로한 것처 럼 보였다. "왜그래 형" "오늘은 어디갔었니?" "그냥 그런 곳에." "바른대로 말해라. 난 네 형이야. 네가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로는 온통 비밀 투성이가 된 것 같아서 난 외롭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고 있거든." 형인 듀렌 테일러가 반은 농담조로, 그러나 아주 구슬프게 들리는 목소 리로 말했다. 그리스는 형을 바라봤다. 서른 한살. 단지 열 네살때 교통사고로 부모 를 잃고, 중학교를 그만 둔 후 두살짜리 동생을 데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듀렌. 열두살이라는 나이차이 때문에 거의 아버지 같은 느낌으로 의지해 왔던 형이었다. "장가나 가버려. 그럼, 외로움증 같은 건 콧배기도 못 내밀껄." 듀렌 테일러는 그 말에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그리 스와 꼭같은 짙은 밤색의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 다. "너 고등학교나 졸업시키고. 자 어딜 갔었니, 말해봐라." "그게 그렇게도 궁금하우?" "궁금하지 않으면 물어보지도 않지." "여자애랑 데이트 했어." 밤에 파파에게서 전화가 왔다. 쥬엘은 기분좋게 전화를 받았다. "어땠어? 파파가 보기엔." "그보다 나와 함께 앉아있던 호프만 박사의 말을 들어보는 게 좋을텐데 요." "호프만 박사? 운동 심리학으로 유명한 M.J. 호프만 박사님이었어?" "그분말씀이 우리 계획에 꼭 맞아 떨어지더군요. 유토피아는 겉으로는 강한 체 하지만, 의지할 데를 항상 찾고 있는 마음 여린 아가씨 같답니 다." "드디어 유토피아의 성격이 확인된 셈이로근. 슬슬 재미있어지는데. 해 낼 수 있겠어." "해내야 합니다. 실수는 용서 못합니다, 쥬엘." "아참, 파파, 그리스 테일러라는 남자에 대해서도 좀 조사해 줘. 아침 에 심판 보던 남자 말야. 학교에서는 미스터 유토피아라고 불릴정도로 유 토피아랑 가깝고, 또 플레이도 닮아있어. 난 그냥 그런 사이인줄 알았는 데, 일요일까지 같이 다니는 걸 보니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아. 그리스 는 굉장히 냉정하고, 게다가 잔인한 면마저 있는 사람이니까 이번 일을 방해할 소지가 충분히 있다구. 뭔가 좀 알고 있어야 대처하든가 하지." "알겠습니다. 빨간 별딱지를 메겨놔야겠군요." "파파, 우리학교 테니스부 코우치에 대해 아는 거 있어?" "글쎄요. 조사해 드릴까요?" "아니, 됐어. 그냥, 모르는 게 오히려 나을 것 같으니까. 굳이 그런 거 알지 않아도, 가을의 전국대회까지 출전하는 데에 방해는 안 당할 거야. 실력있는 사람을 무시할 만큼 몰상식한 사람은 아닐테니까." "출전시키는 건 코우치 맘대로란 걸 잘 기억해 두세요." "알고 있어. 눈밖에 나는 짓은 하지 않아." "그리고 쥬엘, 아무도 믿어선 안 됩니다." "응." 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믿어선 안 돼. "어? 파파, 이만 끊어야겠어. 이 아파트는 12시가 지나면 전기를 끊어 버리는 데다가 내일 스페인어 시험이 있거든. 여기 교과서 취향을 알아놔 야 하니까 한번 훑어 봐야지." "고생이 많습니다." 파파가 낄낄거렸다. "그러게 말야. 파파랑 여행다닐 때가 훨씬 좋은데." "여행이라 -- 멋진 표현이군요. 그 가혹한 훈련에." "파파는 항상 '재미있는 훈련'이라고 했었잖아."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졌어. 파파한테 이기려 든 게 잘못이지. 그래, 재미있는 훈련이었어. 그리고 이번 일도 재미있는 사업이구." 파파의 낮은 웃음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전해졌다. "이만 끊어. 사랑해, 파파." 쥬엘은 전화를 끊고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스페인어 교과서를 펼쳤다. 아주 초보적인 내용들 뿐이었다. 너무 어려운 단어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군. 12시 몇분 전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캐더린 피킨즈였다. "쥬엘? 오늘 아침 어디갔었어? 내가 피자 사가지고 찾아갔었는데." "저런! 그럴 줄 알았으면 나가지 말 걸 그랬지?" "어딜 갔었는데?" "다리 밑에 구걸하러." 쥬엘은 낄낄대고 웃었다. 캐더린이 어이가 없다는 듯 낮게 웃다가 이윽 고 못견디겠다는 듯이 깔깔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쁜 계집애. 난 한참걱정했단 말야. 금요일날 네가 그 검은 자동차에 납치 당해가서 아직 안 돌아온 줄 알았어." "그럴리가. 난 곧 풀려났는 걸. 어떤 열광적인 팬이 날 올리피아 핫세 로 잘못 알았다나.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고 돌아가라던데. 어제 전화했으면 집에 있었을텐데." "어젠 종일 스페인어 시험 공부했어. 난 외국어에 대해선 깡통이란 말 야." 갑자기 불이 나갔다. 암흑속에서 쥬엘은 침대에 앉아 수화기를 든 채였 다. "캐디, 불이 나갔어. 이 아파트는 12시만 되면 불이 나가거든. 전기세 를 줄이기 위해서라나. 어쨌든 지금은 강도가 눈앞에 칼을 들이대도 모를 만큼 깜깜해." "그 아파트 끝까지 마음에 안드네. 그럼 끊어. 내일 봐." "잘 자, 캐디. 내가 무사히 세수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빌어 줘." PART 2. 코우치 율리아 로렌스는 크리스토퍼 프린스와 < 한접시 더 > 라는 레스토랑에 앉아있었다. 말없이 식사가 끝나고 커피가 나오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 어진 율리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왠일이신지요? 저와 만나고 싶으시다는 건."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한 무감정한 목소리였다. "쥬엘이라는 아이 아시죠? 쥬엘 오스몬드 말입니다. 한달쯤 전에 선생 님반으로 전학 온." "쥬엘이요? 아 네, 쥬엘 실버 오스몬드, 그 건방진 아이 말씀이군요." "보통 때에도 그렇게 '건방'진가요?" "아 --, 건방지다기보다는 오히려... 거만하다는 게 맞는 말일 것 같 군요. 네, 늘 그래요." 율리아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어금니를 깨물며 참았다. 그저 쥬엘의 담임선생님으로서 만나달라는 거였군. "그밖에 별다른 점은 없습니까?" "왠걸요. 굉장히 고립되어 있어서 도저히 말을 붙일 수가 없는데다가 고집이 또 얼마나 센지, 저로선 감당하기가 힘들 지경이예요." "고집이 세다뇨?" "지난 주에만 해도 D반의 헨리라는 남학생과 주먹다툼을 하고 있는 걸 간신히 말렸는 걸요. 우리반의 캐더린이라는 학생을 놀렸다나 하는 별 거 아닌 일이었어요. 사람들한테 무심했는데 캐더린을 놀린다구 그렇게 나섰으니 애들이 다 놀랐지요." "주먹질을 해요?" "네. 헨리는 지금도 팔에 기브스를 하고 다니지요. 쥬엘은 테니스부에 서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말짱한 것 같지만." "별난 여자애군요." "여자애 -- 그렇군요. 그 애를 보고 있으면 전혀 여자애란 느낌이 안 들어요. 무뚝뚝하고, 친구도 없고. 낸시라는 그애 옆자리에 앉은 애가 말 을 붙일려고 그렇게 애쓰는데도 대꾸도 안해요. 아무튼 스커트를 한 번도 안 입어본 애 같거든요. 상냥함이라곤 조금도 없고, 조심성도 없고. 그렇 다고 해서 남자애같다는 건 아니지만." "성적은 어떻습니까?" "지난 월요일에 치른 스페인어 시험 결과가 나왔는데 만점이었어요. 도 저히 점수를 깎을 수가 없었다더군요. 스페인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교 수라도 그런 답안은 못 낼거래요. 속담이나 민속까지 알뜰차게 알지 않고 서는." "스페인어 외에는요?" "수학도 뛰어나요. 저보다 많이 알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예요." "역사 선생님께서도 그러시더군요. 대학교 교수를 해도 괜찮을 실력을 가진 것 같다고요." "쥬엘이 말인가요? 태도를 보면 늘 생각이 딴데 가 있는 것 같은데... 물론 단정하긴 하지만 말예요. 똑바로 저를 보고 설명을 듣는 것처럼 반듯이 앉아있지만 눈빛에 생기가 없어요." "그런데도 실력이 뛰어나다?" 크리스토퍼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뉴욕에서는 줄곧 전교 10등안의 수재였었다나 봐요. 경영학을 전공하 고 싶다더군요. 근데 왜 그러시죠? 그 아이가 테니스부에서 무슨 사고 라도 저질렀나요?" "아닙니다. 그저 좀 다루기가 힘들어서요. 커피가 식는군요." 율리아는 얼른 커피잔을 들었다. 내가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 다는 걸 알아챘을까? "쥬엘은 꽉 닫힌 조개껍질 같은 아이로군요. 물론 당신도 그렇지만." 율리아는 할말을 잃었다. 내가 조개껍질 같아? 내가 쉽사리 마음을 터 놓지 않는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나를 눈여겨 보아왔었나? "오늘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그럼, 저는 예정이 있어서 이만." 크리스토퍼는 가만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율리아도 덩달아 엉거주춤 일 어섰다. "아녜요, 오히려 이렇게 저녁까지 얻어먹어서." "아참, 그리고 당신은 그 금테안경보다 콘텍트렌즈를 끼는 것이 더 어 울립니다. 지난번 체육대회때 처럼요. 멋진 주말 보내십시오." 당신과 함께라면 훨씬 더 멋진 주말을 보낼 수 있을거예요. 율리아는 성큼성큼 멀어져가는 크리스토퍼의 키큰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기 볼이 붉 어져있는 것을 느꼈다. 체육대회때 콘텍트렌즈를 꼈었다는 것까지 기억하 고 있어. 크리스토퍼는 아파트로 돌아와 샤워를 했다. 쥬엘은 확실히 보통아이는 아니다. 뉴욕에서 전학온 아이가 그곳에서는 가르치지도 않는 스페인어에 능통하다? 경영학과 지망... 크리스토퍼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유토피아 와만 이야기를 나누는 쥬엘, 경영학과 지망인 유토피아, 남학생을 기부스 하고 다니게 만들어 놓고 태연히 테니스를 칠 정도의 체력을 가진 쥬엘, 꽉 다문 조가비같은 쥬엘... 이건 뭔가 꿍꿍이 속이 있는 게 틀림었어. 거실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크리스토퍼는 얼른 몸을 닦고 가운을 걸쳤다. "여보세요?" "크리스? 잘 있었어요? 나예요, 마리." "또 왠일이야." 크리스토퍼는 상냥하게 대답하려 했지만, 저절로 목소리가 퉁명스러워 져 버렸다. 귀찮은 여자같으니. "어머, 너무하셔. 오랜만에 전화했는데 반갑지도 않아요?" "장난하지 말고 할말 없으면 끊어." 너무 퉁명스러운 대답이라고 느낀 크리스토퍼는 얼른 부드러운 목소리 로 덧붙였다. "난 지금 굉장히 바쁘거든." "할말있어요,나. 오늘 <한접시 더>에서 함께 식사한 여자 말예요, 이탈 리아식 정찬을 먹은." "거기 왔었든가?" "아뇨. 거기 피아니스트가 내 친구예요. 아주 미인이라면서요, 그 여 자. 안경은 썼지만." "좋을 대로 생각해. 어쨌건 다음에 만나든지 하고 오늘은 그만 끊지. 너무 바빠서 말야." "내일 만나요, 그럼. 토요일이니까 아침 10시쯤 만나면 일요일까지 같 이 있을 수 있을거예요." 주말을 온통 마리와 보낸다? 크리스토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안되겠는 걸. 미안해, 마리. 일요일까지는 해야 지금하고 있는 일이 끝날 것 같아. 아주 중요한 일이라서 아무렇게나 해버릴 수도 없어. 정 신없이 바쁘다구." "내가 당신 아파트로 가서 도와드릴까요?" "아니 됐어. 고맙지만 나 혼자 하는게 훨씬 편할 거야." 크리스토퍼는 될수 있는 대로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마리가 화내길 원 치 않았다. "... 좋아요." 할 수 없다는 듯한대답이었다. "그럼 내가 월요일에 당 신 학교로 갈께요. 그리고 그 금테안경 코앞에서 당신한테 열렬히 키쓰 해야지." 탈가닥. 크리스토퍼가 채 대꾸하기도 전에 마리는 재빨리 전화를 끊었 다. 크리스토퍼는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놨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담배를 꺼내물었다. 마리는 귀 찮기도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두려운 존재다. 만난지 2년도 채 안되었 는데도 크리스토퍼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다. -- 벌써 그 금테 안경이 같은 학교 선생이란 것까지 알고 있으니. 게다가 하고 싶은 일은 무슨수 를 써서든지 하고야 마는 그 불같은 성미, 넋을 잃게 하는 아름다움 --. 크리스토퍼는 물고 있던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부벼서 껐다. 마리 그랑 디에. 붉은 머리의 프랑스 여자. 그녀가 밉다. 그녀로부터 자유로와지고 싶다. 월요일에 정말 학교로 찾아온다면 또 한바탕 귀찮게 할 것이었다. 저녁 식사와 영화와 산책과 호텔 -- 마리에게는 빚이 있어서 함부로 거절할 수 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마리가 화내길 원치 않았다. 크리스토퍼는 12살 때 부모가 이혼하자 가출했었다. 아무런 계획없이 무작정 뛰쳐나왔던 그는 돈이 떨어지자 대부분의 가출 소년들 처럼 암흑 조직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이름은?" 크리스토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땅딸막한 녀 석을 잔뜩 노려볼 뿐이었다. "이 새끼가 입이 붙었나!" 크리스토퍼는 뺨에 불이 붙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쓰러졌다. 입안에 서 피가 배어나왔다. 녀석은 주먹이 셌다. "대답해라, 이름은?" "토마스 소오여." "뭐라고?" "존 레논." "거 참, 녀석." 땅딸막한 녀석은 껄껄거리며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좋다, 내가 네녀석의 이름을 지어주지. 알렉스가 어떠냐?" 그때부터 크리스토퍼는 그 열여덟 먹은 땅딸막한 녀석 -- 물론 열 두살 의 크리스토퍼 보다는 컸지만 -- 의 부하가 됐다. 땅딸막한 녀석은 대부 분의 대장들보다 어렸지만 주먹이 셌기 때문에 따라서 세력도 컸다. 새로 들어온 알렉스 -- 크리스토퍼 --의 소문은 빨리 퍼져나갔다. 누가 보아도, 커서 건장한 체격과 단단한 주먹의 소유자가 될 거라는 건 분명 했다. 드디어 부러워하다 못한 다른 패거리의 대장들이싸움을 걸어왔다. 알렉스를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이자는 것이었다. 그 부근의 대장들 여섯이 모두 모였다. 땅달막한 녀석은 하나씩 차례로 때려눕혔다. 시간은 한참 걸렸지만 결국 모두에게 이긴 것이었다. 땅딸막한 녀석은 그 부근 전체의 세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자, 자연히 그 부근 밖의 큰 세력과 싸움이 붙게 됐다. 그쪽 패거 리의 대장은 20대 초반쯤이었는데 검은 양복을 입고 짙은 곤색 넥타이를 맨 <신사>였다. 신사와 눈이 마주쳤을 때 크리스토퍼는 가슴이 덜컹 내려 앉는 것 같았다. 신사는 빙그레 웃어주었다. 눈동자가 너무도 해맑은 사 람이었다. 결국 신사와 땅딸막한 녀석은 땅거미가 내린 텅 빈 공원에서 알렉스를 놓고 한판 붙었다. 신사는 양복 웃도리도 벗지 않고 태연히 서서 땅딸막 한 녀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땅딸막한 녀석이 달려들었다. 신사는 자기 어깨치도 안 오는 땅딸막한 녀석을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더니, 날 아오는 주먹을 슬쩍 피하고는 팔을 잡아 비틀었다. 땅딸막한 녀석이 비명 을 질렀다. 신사가 팔을 놔주고는 녀석의 복부에 주먹을 날렸다. 싸움은 끝났다. 신사가 크리스토퍼를 향해 양팔을 벌리며 포근한 미소를 띠었다. 크리스토퍼는 쭈삣쭈삣 다가가 신사에게 안기며 아버지에게서보다 훨씬 따스한 정을 느꼈다. 그때엔 벌써 열 세살이 되어있었다. 신사는 모든 면에서 땅딸막한 녀석과는 달랐다. 그는 크리스토퍼를 그 냥 졸개로 다루지만은 않았다. 땅달막한 녀석에게서 배운 좋지 못한 손버 릇을 엄밀히 금지시켰고, 대신에 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멋진 훈 련을 시켜주었다. 주먹을 쓰는 법과 참는 법, 표창과 단도의 사용법에서 부터 정보처리 기술까지. 그러나 크리스토퍼에게 있어서 가장 마음에 든 것은 아무래도 기타를 다루는 방법을 배운 거였다. 기타를 튕기며 내키는 대로 노래를 불러제끼고 있노라면 쓸데없는 생각은 모두 사라지고 아주 편안한 기분이 되곤 했다. 15살되던 해 생일날, 크리스토퍼는 난생 처음 생일선물이란 걸 받아봤 다. "알렉스, 네 생일선물이다." 신사는 커다란 상자를 내밀었다. 알렉스는 얼떨결에 받아들고는 어리둥 절해서 신사를 바라봤다. "뭘 쳐다보냐. 끌러봐라. 마음에 들런지 모르겠다." 신사는 겸연쩍은지 고개를 돌리고 담배를 꺼내물었다. 그로서는 가장 마음에 드는 부하에게 주는 정성이었지만, 아무래도 선물이라는 건 쑥스 러웠다. "어떻게... 어떻게 내 생일을 알았어요?" "자아식, 정보 처리하는 법을 기껏 배워놓고 그게 무슨 헷소리냐!" 신사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알렉스는 선물을 끄르려다 말고 다시 신사 를 쳐다봤다. "그럼 내가 누군지도 알겠군요. 왜 우리 아버지에게 연락해서 날 잡아 가라고 하지 않죠? 난 가출한 학생인데." "잔소리 말고 끌러보기나 해!" 신사가 소리를 빽 질렀다. "네가 정 아버지가 보고싶다면 여기 있다고 알려줄 수도 있어. 하지만 난 너같은 부하를 잃고싶진 않으니까." 알렉스는 환히 웃었다. 그런 알렉스의 약간 긴 듯한 갈색 머리칼을 옆 으로 넘겨주며 신사도 부드럽게 웃었다. 알렉스는 선물을 끌렀다. 그 커 다란 상자속에서 나타난 것은 -- 기타였다! "이, 이건..." 알렉스는 기타를 끌어안고 눈물이 글썽해서 신사를 쳐다보았다. 중고품 인지 모서리가 반들반들하게 닳아있었지만 상당히 고급품이었다. "마음에 드냐? 한번 튕겨보지 그래." 자기 기타로 연주하는 첫곡 -- 아직은 그리 숙달되지 않은 솜씨였지만 멜로디 하나하나가 가슴에 젖어들었다. 신사가 최근에 가르쳐줬던 <케세 라세라>였다. 연주가 끝나자 기어코 눈물 한방울이 또르르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열여덟살이 되자 알렉스는 명실공히 그 조직의 두뇌로서 인정받고 있었 다. 알렉스는 과연 누구라도 탐낼만한 인물이었다. 신사는 알렉스에게 자 문하지 않고서는 결코 행동개시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실제로, 행동개시 직전에 알렉스가 다시 한번 정찰해 보는 게 좋겠다고 건의해서 총구멍에 둘러싸일 뻔한 위기를 모면한 적도 있었으니까. 열여덟살의 알렉스는 부 드러운 갈색 머리와 푸른 눈을 가진 건장한 청년이었다. 키도 신사와 비 슷할 만큼 자랐고, 결단력도 있어서 지도자로서의 재질이 엿보였다. 신사 와는 마치 한핏줄인 것처럼 마음이 통했다. 신사는 그를 믿어주었고, 그 는 신사를 존경했다. 크리스는 신사만큼이나 머리가 좋았고 계획성이 있 었으며, 주먹도 물론 두뇌와 어울리는 앙상블을 지녔다. 신사가 하고자 하는 일은 때때로 아주 엉뚱했다. 대기업에서 서류를 빼내오거나, 컴퓨터 로 전산처리 작동하는 것을 망가뜨려놓거나 하는 등의 아무런 이득도 되 지 않는 일을 하곤 했다. 궁금히 여긴 알렉스가 묻자, 그는 그저 '내가 하도록 규정지어진 일이기 때문'이라고만 했다. 알렉스는 더이상 묻지 않 았다. 열아홉살 되던 해 여름, 현지 정찰을 나갔던 알렉스는 그곳 테니스 코 오트에서 경기가 열리고 있는 걸 봤다. 동네 축제형식으로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거였는데, 네트를 사이에 두고 공이 왔다갔다 하는 게 아주 재미 있어보였다.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아서, 게다가 잠시 시간을 때울 필요 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출전하기로 했다. 1등은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 승패기록을 담당한 사람이 빌려준 라켓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그가 라켓 을 쥐는 걸 유심히 보고 있던 그 사람은 라켓 쥐는 법을 고쳐주었다. "그 렇게 쥐고 경기를 한다면 손바닥 전체에 물집이 생기걸요." 처음 해보는 테니스 경기 -- 이길리가 없었다. 아니, 단순히 진게 아니라 단 한점도 따내지 못한체 게임이 끝나버린 것이었다. 관중들은 소리내어 웃지는 않 았지만, 알렉스에겐 세상이 떠나갈 듯하게 웃어젖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비참했다. 비록 정찰을 마친 후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알렉스에 게 이긴 그 사람이 준우승을 해서 벽시계를 상으로 타는 걸 목격하긴했지 만. 알렉스는 그 이후로 신사에게서 테니스를 배웠다. 신사는 테니스 실력 또한 프로급이었다. 적어도 알렉스가 알고 있는 한도내에서는 신사가 못 하는 일이라곤 존재하지 않았다. 그게 알렉스가 신사를 존경하는 이유중 에 하나였다. 알렉스는 정말 미친듯이 테니스를 쳐댔다. 기타 이외에 그 렇게 열중해 보긴 처음이었다. 틈만 나면 가까운 코오트로 달려가서 아무 나 상대로 테니스를 치곤 했다. 상대가 없으면 벽을 상대로 했고, 가끔씩 신사가 상대를 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정열을 쏟은 덕분에 테니스 실력도 신사와 비슷한 수준까지 이를 수 있었다. 결코 신사에게는 이기지 못했지 만. -- 신사는 늘 알렉스보다 앞서가고 있었다. 무슨 일을 하던 뛰어나게 해내는 신사를 알렉스는 정말 친형제처럼 따랐다. 신사는 알렉스에게 있 어서 완벽한 존재였다. 21세가 되자 알렉스는 주위에서 '최고의 사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신사는 흐뭇해 했다. 알렉스는 신사의 자랑거리였다. 열세 살때 이후로 줄곤 신사와 함께 신사의 아파트에서 살아온 알렉스였기에 그는 신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고, 가장 가까운 가족이자친구였다. 그들은 서로에게 최고의 믿음을 주었다. 비밀이 없는 사이였다. 신사가 해내는 그 '내가 하도록 규정지어진 일'에 대해서만 빼고는. 그해 첫눈이 흩날리던 날 저녁 10시가 가까운 무렵이었다. 신사는 프랑 스에 볼일이 있다며 떠났기 때문에 알렉스 혼자서 기타를 퉁기며 앉아있 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하얀색 털코트를 잔뜩 여미고 하얀 털모자를 쓴 채 하얗게 눈을 맞은 여자가 서 있었다. "누구시죠?" "들어가서 얘기할께요." 여자는 망설이지도 않고 집안으로 들어와 모자를 벗었다. 물결치는 듯 한 붉은 머리가 흘러내렸다. 여자는 털코트도 벗었다. 알렉스가 코트를 받아 벽에 걸었다. 여자는 부드러운 갈색 스웨터와 무릎에 채 못미치 는 검은색 가죽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여자는 기다란 붉은 머리를 뒤로 넘기더니 성큼성큼 걸어가 거실 소파에 앉았다. 알렉스는 여자의 설명을 기다리며 여자의 맞은 편에 앉으려 했다. "서 있어요! 난 아직 앉으라고 하지 않았는데요? 앙트와느가 그렇게 가 르치던가요?" 알렉스는 그러한 여자를 한번 쳐다본 후 그냥 앉았다. 여자는 그러한 알렉스의 태도에 당황한 듯 했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앙트와느 그랑 디에 -- 그건 신사의 이름이었다. "내가 누군지 무척 궁금하다는 표정이군요. 난 마리 그랑디에.예요. 앙트와느의 동생이지요. 당신은요?" "아 그러세요. 이거 실례했군요. 전 알렉스라고 합니다." 알렉스는 여자의 눈이 에메랄드같다고 생각했다. -- 신사가 늘 사용하 는 넥타이핀에 박혀있는 것보다는 천배쯤 더 아름다운! "본명은요? 난 자기소개할 때 성을 안 밝히는 사람은 본명이 따로 있다 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알렉스가 대답을 하지 않자, 여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말하기 싫으면 관둬요. 앙트와느에게서 당신에 대한 말은 많이 들었어 요. 그가 남을 칭찬하는 일은 거의 없는데 당신에 대해서만은 '알렉스 는 멋진 놈이야.'라고 하던 걸요." 여자는 생각난 듯이 덧붙였다. "그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군요. 앙트와느의 눈은 정확한 편이니까 요." 알렉스는 공연히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태연하게 보이려고 탁 자위의 담배상자에서 담배를 꺼내들었다. 여자가 흘긋 보더니 자기도 한 개비를 꺼내들었다. 알렉스는 불을 붙여주면서 신사의 동생치고는 상당히 무례하고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기껏해야 열여덟이나 열아홉쯤 먹었을 것 같아 보이는데. 말없이 담배를 다 피우고 나자 신고 있던 무릎까지 오는 하얀 부츠를 벗으며 여자가 말했다. "머 갈아입을 옷 없겠어요? 샤워를 하고 싶은데. 이 스웨터는 눈에 젖 어서 세배는 무거워진 것 같아요." 알렉스는 여자의 다리에 시선을 주었다. 날씬한 다리였다. 약간 가냘퍼 보이기도 했지만 건강해 보이는, 튼튼할 것 같은 다리였다. 빨간색 스타 킹에 싸여있는 살갗은 탄력있어보였다. 알렉스는 신사의 침실로 가서 옷 장에서 신사의 스웨터를 가져왔다. 그녀에겐 너무 크겠지만 달리 마땅한 게 없었다. "고마와요, 알렉스." 여자는 스웨터를 받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구슬을 굴리는 것 같은 목 소리였다. 여자가 욕실안으로 사라지자 알렉스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 다. 신사는 자기 가족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따. 신사와 닮은 구석은 없었지만 얼굴윤곽이 뚜렷하고 잘생겼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잠 시 생각하다가 알렉스는 기타를 집어들었다. 생각한다고 해도 별로 도움 될만한 단서는 없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조용한 팝송을 부르기 시작하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곡이 거의 끝날 때쯤 해서 여자가 다시 되돌아왔다. 긴 붉은 머리는 약간 젖은 채로 늘어뜨려져 있고, 거의 무릎 까지. 닿는 커다란 신사의 스웨터를 입은 채 허리에는 금줄로 된 벨트를 매고 있었다. 알렉스는 감탄했다. 새하얀 피부가 눈이 부셨다. "먹을 거 좀 남은 게 있겠지요?" 여자는 익숙하게 부엌으로 가서 부시럭거리며 뭔가 요리를 하는 듯했 다. 그저 간단히 밤참을 먹는 식의 요리를 만들어 온 여자가 알렉스에게 도 권했다. 다 먹고 나자 여자는 알렉스에게 기타를 쳐 보라고 졸랐다. "솜씨가 꽤 좋은 것 같던데요. 저 그곡 칠 수 있어요? <파리의 하늘에 도 눈은 나리고> 말예요. 첫눈이 오니까 고향생각이 나네요."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기타를 집어들었다. 신사로부터 프랑스어를 약간 배우는 동안에 익힌 노래였다. 여자가 노래를 불렀다. 샹송은 부드 럽고 감미로왔다. 여자는 노래를 잘했다. 다음날 저녁 신사가 돌아오자 여자를 보고 굉장히 반가와했다. "야아, 마리, 이게 얼마만이지? 언제왔어?" 여자가 신사의 목을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어제요. 당신 침대에서 잤어요. 어머, 못본 새에 좀 야윈 것 같은데, 왠일이예요? 걱정거리라도?" "지금 해결하고 돌아오는 일이니까 걱정말라구. 다 끝냈으니까." 알렉스는 자기에게.조차 말해주지 않는 '고민거리'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또 틀림없이 그 '내가 하도록 규정지어진 일'에 관한 것일테니까. 마리는 그 뒤로 계속 신사의 집에서 묵었다. 아파트에는 방이 두개 뿐 이었기 때문에 알렉스가 거실 소파에서 잤다. 두달쯤 지나고 새해도 무르 익을 무렵이 되자 그는 마리 그랑디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 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신사에게서는 느낄 수없었던 감정이 마리에게는 솟아났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이리라는 생각을 한 그는 스스로 비웃 었다. 두달 전만 해도 아름답지만 건방지고 무례해서 가치가 없다고 생 각했었는데 이젠 판단력마저 흐려졌단 말인가. 그러나 억제할 수는 없는 감정이었다. "마리, 할말이 있는데." "뭔데요, 알렉스?" 마리는 알렉스를 신사와 똑같은 태도로 대해주었다. 투정을 부리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는 형제처럼. 그도 동생처럼 대하려고 했었다. 건장하고 당당하기만 하던 알렉스도 이때만은 수줍은 소년같았다. 조심스럽게 고백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는 깔깔거리며 웃어제꼈다. 알렉스가 눈썹을 치껴 떴다. "뭐가 우습지?" "미안해요, 알렉스, 하지만 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웃은 게 미안하다는 건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게 미안한 건지 알렉스 로서는 알 수 없었다. "누군지 말해줄 수 있겠어?" 마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마리는 '할수 없군요.'하는 식의 표현을 그렇 게 하는 게 버릇이었다. "앙트와느예요. 달리 누가 있겠어요? 하지만 앙트와느가 없었다면 난 당신을 사랑했을 거예요. 이건 진심이예요." 마리는 알렉스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돌아서서 아파트를 나갔 다. 알렉스가 혼자있고 싶어할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알렉스는 소파 위에 멍청히 앉아있었다. 그런 식의 대답이 돌아올 줄은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제서야 그는 신사의 아버지와 마리의 어머니가 결혼한 것은 마리가 여섯살 때, 그리고 신사는 이미 이 조직에 가입되어 있던 열아홉 살 때였다는 걸 기억해 냈다. 피라곤 한방울도 섞이지 않은 남매라. -- 알렉스는 뭣때문에랄 것도 없이 마구 분노가 솟아올랐다. 마리고 신사고 간에 모두 목을 비틀어 없애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벽에 세워져 있는 기타를 흘깃 노려봤다. 그리고는 그걸 들고 밖으로 나가 계단의 시멘트 돌에 힘껏 내리쳤다. 두번, 세번,... 기타는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뭔가 통쾌한 기분이었지만 후련하지는 않았다. '그래, 앙트와느의 곁에 있는 한 결코 그보다 나은 사람이 될 수는 없 어.' 알렉스는 중얼거렸다. 얼마 후 집안에 들어선 신사는 알렉스가 한쪽 구 석에 웅크리고 멍하니 앉아있는 걸 발견했다. "알렉스, 네가 할일이 생겼다." 알렉스는 고개를 들어 신사를 노려봤다. "왜 그래? 머 기분나쁜 일이라도 있었냐? 하여간 지금 D구역에서 애들 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가서 잠복할 곳을 지시해 줘라. 30분쯤 후면 사건이 터질.거야." 알렉스는 묵묵히 일어나 담배를 피워무는 신사를 뒤로 하고 D구역으로 갔다. 일은 신사가 만족할만한 방향으로 처리됐다. 다음날 아침, 신사의 명령에 따라 아파트를 나서는 알렉스를 마리가 뒤 쫓아왔다. "나에게 무슨 볼일이 있지?" 딱딱한 물음이었다. 누구라도 기가 꺾일만큼 싸늘한 목소리였다. "너무 그러지 말아요, 알렉스. 내가 보기가 딱하잖아요. 지금의 당신을 보면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 같아요. 별 수 없이 앙트와느의 곁에 남아 있는, 날개가 부러져버린 황새같다구요." "사실인걸." "여기를 떠나고 싶은 거예요, 진심으로?"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마리가 귀엽다는 듯이 살짝 꼬집었다. " 알렉스, 당신은 바보예요." "응, 난 바보야." "정말 떠나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께요. 가엾어서 못 보겠다구요." "불가능할 거야." "내가 돕는다면 가능해요." 마리는 신사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썼다. 알렉스를 너무너무 사랑 한 나머지 이렇게 떠날 수 밖에 없다는, 알렉스와 자신을 원망하거나 하 지는 말아달라는 식의 내용이었다. 알렉스도 편지를 썼다. 그는 단순히 <나는 당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합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습 니다. 죄송합니다.>라고만 썼다. 기차를 타고 창밖의 풍경이 달라지는 걸 바라보면서 알렉스는 뭔가 허 탈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부터 뭘 해야 하나 하는 두려움도 일었다. 마리 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자고 있었다. 풍성한 빨간 머리는 여전히 아름다왔다. 열렬히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여자였는데 의외로 담담해 진 것은 알렉스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은연중 에 잠이 들었다가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리는 바람에 눈을 떴다. 검은 양 복에 짙은 곤색 넥타이를 맨 30대 청년이었다. 그는 가만이 편지봉투를 내미더니, 곤히 자고 있는 마리쪽을 흘깃 바라보고는 나직히 말했다. "좋은 여행되시길 바랍니다." 그는 기분좋은 미소를 짓고는 멀어져 가버렸다. 알렉스는 왠지 기분이 굉장히 좋아졌다. 그 청년의 미소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봉투를 뜯자 낯익은 신사의 필적이 나타났다. 마리가 얼마나 고 집이 센 여자인지를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떠나가 는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것과, 언제든지 마음내킬 때 돌아와도 환영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따스한 정이 폭폭 풍기는 편지였다. 달리는 기 차안까지 신사가 보낸 편지가 도착한다? 알렉스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 다. 만일 아무말없이 탈출했다면 등에 표창을 세 개쯤 맞고 뒷골목에 죽 어 넘어져 있게 됐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알렉스는 킥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 "뭐가 그렇게 우스워요?" 웃는 바람에 깨어난 마리가 알렉스의 어깨에서 머리를 들고 몽롱한 표 정으로 물었다. 알렉스는 편지를 접어서 잠바 안주머니에 넣었다. "아니, 그냥. 근데 앙트와느가 당신을 오해하진 않을까? 당신이 정말로 날 사랑한다고 말야." "상관없어요. 어차피 짝사랑이었는 걸요. 차라리 앙트와느가 질투라도 해준다면 좋겠어요. 난 그에게 있어선 그저 동생일 뿐이라니까요." 마리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잠들어버렸다. 런던의 변두리 어딘가에서 내린 그들은 호텔로 들어갔다. 처음이자 마 지막 -- 그들은 서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 헤어지면 영원히 안 녕이라는. 그래서 그들은 단지 하룻밤을 즐기려 했을 뿐이었다. 허나, 다 음날 아침, 마리는 크리스에게서 떨어지려하지 않았다. "알렉스,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이예요. 근사한 사람이라구요l. 나, 당신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것 같아요." 만일 마리의 말투가 조금이라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띠고 있었다면 알 렉스는 마구 가슴이 뛰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수백번쯤 지껄여 본 말 인듯 '굳모닝'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데에는 그만 정떨어져서 마리가 추 해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이번엔 당신이예요.'라는 듯이 금방이라도 떨 어져 나가 더 멋진 남자를 찾을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엊저녁까지도 무심 하다가 오늘아침 사랑한다고 내뱉는 여자에게 어떻게 애정을 느낄 수가 있겠는가. 경멸하지 않는게 다행이지. 알렉스는 신사에게서 이런 식 으로 생각하도록 배워왔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마 리는 -- 그 눈부시게 아름다운 빨강머리의 프랑스 여자 마리는 과연 <신 사가 두손 들만한> 고집을 가진 여자였다. 결코 알렉스를 놓치지 않았다. 마리는 알렉스에 관해선 늘 무엇이나 알고 있었다. 런던의 변두리에 도 착했었던 그날 이후로 그에 관한 정보거리를 사들이기 시작했고 본명을 알게 된 이후로는 '크리스'라 불렀다. 마리는 대단한 여자였다. 신사만큼 이나 능력있고 또 -- 아름다왔다. 그해 6월, <크리스토퍼 프린스>는 앨런 사모아 고등학교 테니스 부의 코우치 자리를 얻었다. 미친듯이 테니스를 쳐 왔던 경력은 단지 시범으로 공 몇개를 쳐 보임으로써 그 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학교 전 체가 이 새로운 코우치에게 집중되었다. 여학생들의 일기장에는 코우치의 이름이 오르내렸고, 남학생들은 그를 존경했다. 그는 앨런 사모아 고등학 교의 우상으로 대우받았다. 게다가 그해 10월, 해마다 열리는 고교 태니 스 대회에서 1학년생인 유토피아와 그리스가 당당히 금메달을 따내자, 이 새로운 코우치의 능력은 완전히 인정받게 되었다. 그동안에도 마리는 일주일에 적어도 한번, 많으면 다섯번도 전화를 걸 어왔으며, 그야말로 크리스토퍼를 <귀찮게> 해댔다. 그리고 한달에 두번 이상은 꼬박꼬박 만나왔다.크리스토퍼는 마리가 신사와 연결된 선이라는 것과 자신을 도와주었다는 것 때문에 함부로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마리가 화내는 걸 원치 않았다. 쥬엘 오스몬드는 노우트에다 코우치의 얼굴을 대충 그려보았다. 싸인펜 으로 색칠도 해 보았다. 갈색 머리칼이 목덜미 부근에 살랑거리고 바다색 깔의 눈동자가 약간은 노기를 띠고 바라보고 있는 --. 몽타아즈 작성훈련 에서 'A+'를 받았던 솜씨답게, 쥬엘의 노우트 위에선 코우치가 생생하게 살아서 쥬엘을 노려보고 있었다. '분위기가 파파와 비슷해. 믿어도 될 것 같은 사람이야. 짓궂은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역시 파파에게 조사해 달래는 게 좋았을까?' 잠시 바라보다가 쥬엘은 노우트 장을 짜악 찢어냈다. 그때 누군가가 어 깨를 툭 쳤다. 돌아다보니 캐더린 피킨즈다. 아파트 문이 열려 있었던가. "뭐해?" 캐더린은 빙글거리며 웃었다. 쥬엘은 방금 찢어낸 노우트장을 잽싸게 구겼지만 캐더린은 그걸 보고 말았다. 그리고는 기어코 그 종이를 뺏어들 고는 펴 보고야 말았다. "야~, 너 그림 굉장히 잘 그리는구나, 쥬엘." 쥬엘은 약간 화가 나 있는 듯 했지만, 캐더린은 일부러 모른 척 했다. "걱정마, 뭐. 우리 학교 애들의 70% 쯤은 크리스토퍼를 좋아할텐데 머. 40%쯤은 그리스 테일러를 좋아할 꺼고. 10%는 겹치기로 좋아하는 애들 일꺼고. 나한테까지 그럴 것 없잖아." 쥬엘은 잠시 망설였다. 캐더린이 자신을 이런식으로 코우치나 우상화하 는 다른 애들과 같게 취급한다면 계획과 어긋나게 될 지도 모른다. 철저 한 공부벌레... 이성으로 똘똘 뭉쳐진... 그런 이미지로 생각되어야 하는 데... 그래, 며칠 정도쯤 절교해 두는 것도 좋겠지. 이 아이 같으면 절교 한 친구라고 해서 나쁜 소문을 지껄이고 다니지는 않을테니까. 낸시 스왈 러라면 몰라도. "이리 줘." 쥬엘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캐더린은 움찔했다. 쥬엘의 눈이 분노로 활활 타는게 보였다. 갑자기 쥬엘이 벌떡 일어났다. 키가 큰 쥬엘 -- 캐더린은 얻어맞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눈을 감으며 몸을 움츠렸다. 쥬엘은 캐더린의 손에서 거칠게 종이를 뺏어들고는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이젠 돌아가, 캐더린." 캐더린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잘못했어... 안 그럴께... 를 되풀이해 댔다. '캐디'라고 부르지도 않았어. 저건 절교란 뜻이겠지. "돌아가란 말야!" 아파트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큰 목소리에 캐더린은 깜짝 놀라 서 마치 '팟'하고 사라지듯이 돌아가 버렸다. '그래, 아무도 믿어서는 안 돼. 코우치도, 저 애도.' 쥬엘은 어정쩡한 미소를 띤 채 발밑에 널려있는 갈기갈기 찢긴 노우트 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보세요?" "낸시니? 나야, 캐디." "응, 캐디? 나 지금 뭘 먹고 있는지 아니? 크림과자야. 이몸이 손수 만 든 거라구. 입안에서 살살 녹는 거 같아. 안 올래? 좀 남겨 놓을께." "알았어. 곧 갈... 흑." 캐더린은 전화기에 대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왜 그래, 캐디? 어디 아프니?" 10분 후, 캐더린 피킨즈는 낸시 스왈러의 집에 도착했다. 낸시와 만나 자마자 다시 울음보가 터져버린 캐더린은 그칠 줄을 몰랐다. "진정해. 왜 그래 대체. 실연이라도 당한 사람 같다, 얘." "절교 당했다고 하면 믿을래?" "절교를 당해? 누구한테? 누가 너같이 착한 애와 절교를 해?" 캐더린은 잠시 망설였다. 말해버려도 될까? 역시 말할 수는 없어. 낸시 가 상처를 입을까봐 여태껏 학교 안에선 쥬엘과 아는 체도 안했었는데, 이제와서 말한댔자 날 원망하기만 할거야. "낸시, 넌 착한 애야." "새삼스레 왜 또 그래?" "그냥. 오늘따라 네 주근깨로 가득찬 얼굴이 굉장히 착하게 보여서." "애개, 또 남 아픈데 찌르네. 빨간 머리 왈가닥 같으니." "아아, 그래 맞아. 우리가 빨간머리이면서 주근깨 투성이가 아닌게 다 행이야, 그지?" 캐더린이 웃는 모습을 보고 낸시도 미소지었다. 이제 캐디도 기분이 좀 나아졌는가 봐. "과자 준다더니 왜 안줘? 네 솜씨 좀 보고 싶은데." "다 먹고 하나 남았는데 그거 남기기가 미안해서 먹어버렸어." 이제 6월이 되었다. 6월 1일은 월요일로 시작되었다. 마리가 학교로 오 기로 약속한 그 월요일. 크리스토퍼는 주말을 온통 마리와 헤어질 궁리를 하면서 보냈었다. "프린스씨, 면회예요. 빨간머리의 여자분인데요." 율리아 로렌스가 -- 하필 율리아가 마리의 면회를 알려주었다. 그녀의 눈빛은 약간 분노로 타는 듯한 느낌을 내비치었고, 금테 안경이 유난히 차가와 보였다. "아, 네 감사합니다. -- 여전히 안경이시로군요." 크리스토퍼는 빙글거리며 웃었다. 율리아는 볼이 약간 붉어지며 뒤돌아 서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크리스토퍼는 라켓을 놓고 타월로 땀을 닦으며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다 봤다. '로렌스 선생님도 코우치에게 끌리는가 보군. 저 칼날같은 선생님이 말 야.' 쥬엘은 미소지었다. 크리스토퍼는 연습중이던 선수들 열 네명 전원에게 연습량을 부여한 후 남자부 주장인 그리스에게 실행 여부를 체크할 것을 명하고는 코트를 빠져나갔다. 교사 휴게실로 들어서자마자 붉고 폭신한 머리칼이 뺨에 와 닿았다. 마 리가 크리스토퍼의 목에 팔을 감은 것이다. "기다렸죠, 크리스?" 꿀같은 목소리였다. 붉은 원피스에 새빨간 샌들을 신은 그녀는 촌스럽 지도 야하지도 않았고, 그저 어울리는 옷차림을 했다는 느낌을 주었다. 붉은 머리의 강렬한 인상을 어느 정도 뒷바침해주는 옷차림이었다. "꽤 오랜만이군, 마리. 더 예뻐졌나 봐." 크리스토퍼는 마리를 떼어놓고 뺨을 톡 건드렸다. "어쩌죠, 크리스? 이젠 <더 예뻐진 마리>의 모습은 볼 수 없게 되었어 요. 우리 헤어져야 해요." 이게 무슨 천국의 소리인가? 헤어질 구실을 만드느라고 얼마나 밤잠을 설쳤는데 자진해서 헤어져 주겠다니? 크리스토퍼는 놀라서 마리를 뚫어지 게 쳐다보았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어쨌든 사실인걸요." 마리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가 토요일날 만났더라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우린 지금에야 만났잖아요? 그렇게 얼빠진 표정 짓지 말아요. 차근차근 이야 기할테니까. 토요일 저녁에 앙트와느가 찾아와서 내게 일을 맡겼어요. 요 번주 토요일부터 계속 말이예요. 적어도 넉달, 길면 다섯달쯤은 걸릴거 예요." "반년? 그 후에는?"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난 다섯달이나 당신을 잡아놓을 자신이 없다구요. 게다가 그 금테안경 말예요. 생각보다 굉장히 미인이던 걸요. 말해봐요, 그녀를 좋아하나 요?" "글쎄, 아직은." "'아직'이라면 가능성은 있군요." "마리가 없다면 가능하게 될 수도 있겠지." 마리는 배시시 웃었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 같은데요. 하지만 크리스, 난 정말 당신을 사랑 했어요. 알고 있죠?"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 라보고 있던 마리가 갑자기 크리스의 뺨에 키쓰했다. "영원히 안녕, 내사랑." "안녕, 마리." 크리스는 손을 흔들어주었고 붉은 머리의 여자는 또각거리며 돌아섰다. 마리의 모습이 문밖으로 사라지자, 크리스는 신경질 적으로 담배를 비벼 껐다. 쥬엘은 천정을 바라다보고 누워있었다. 내일은 6월 5일 금요일. 수업이 끝나면 파파의 집으로 가서 의논하고 일요일밤이 되어서야 다시 돌아오게 된다. 토요일 하루는 아마 온통 테니스 훈련으로 보내게 될 거야. 누군가 상대해 줄만한 사람이 있으면 좋겠는데. 파파처럼 바쁘지 않고 좀 한가한 사람이 말야. "미안, 쥬엘." "됐어, 캐디." 6월 5일 금요일. 자존심을 그대로 간직한 채, 쥬엘 오스몬드, 캐더린 피킨즈와 화해하다. PART 3. 토요일 쥬엘은 아침 햇볕에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여섯 시. 해는 그다지 높 지 않았지만 환하고 따스했다. 쥬엘의 뒷골목 아파트와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쥬엘은 일어나서 츄리닝을 걸쳤다. 그리고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열었 다. 여기는 파파의 집. 꼭 두주일만에 다시 와본 파파의 집은 여전히 마음 편하고 상쾌하다. 세수를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정원으로 내려섰다. 30분의 조깅, 이것은 파파의 집에서 아침을 맞을 때마다 하는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방으로 돌아가 검은 양복을 갈아입고 나자, 식당으로 갔다. 언제나 그 랬던 것처럼 파파가 한가운데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굳모닝, 파파."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쥬엘." "정말 충분히 편하게 잤어. 기분 좋게." "어제 말씀드린 건 다 검토해 보셨겠지요." "응. 근데 유토피아가 10월에 전국대회에서 금메달을 따서 유럽대회에 나가게 되면 끝장이잖아. 좀 더 서둘러야 좋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어젯밤에 그 일에 대해 결론이 났습니다. 가을의 전국 대회를 D데이로 하기로요. 오스트레일리아 같은 나라에서 프로를 지망하 는 애들을 두셋, 아니 서너명쯤 데려와서 출전시킬테니까 어떻게든 유토 피아의 메달권 진입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O.K. 좋았어, 파파." "8시 정각에 당신에게 테니스 훈련을 시킬 사람이 오도록 했습니다. 식사 마치고 준비해 두세요." "알았어. 앞으로도 계속이야, 아니면 오늘만 임시로 그 사람이야?" "임시로 가르치게 할 거라면 5주간이나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그 사람 을 구하느라고 영국에 오자마자 사방팔방 다녔으니까요. 결국 가까운 곳 에서 찾게 되긴 했지만." "야아, 기대해도 되겠는데." "다음 주부터는 당신의 아파트에서 함께 살게 될 겁니다. 아무래도 함 께 지내는 게 가르치기에 가장 편하지요." "함께 살아? 여자야?" 파파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해 낼 수 있을까? 나보다 먼저 지쳐버리면 재미없잖아." 그 여자는 지치지는 않습니다.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해서 지쳐도 그다지 밖으로 나타나지 않지요. 당신처럼." "알만해. 그녀도 이런 넥타이핀을 달고 검은 양복을 입고 다니나 보 지?" 파파가 킥킥거렸다. "아닙니다. 능력은 있지만, 완전한 우리측 사람은 안 됐지요. 성격때 문에요. 하지만 반쯤은 우리측 훈련을 받아 자라온 여자니까 걱정할 건 없습니다. 배반은 못해요. 또... 앙트와느의 동생이기도 합니다. 쥬엘, 당신은 우리측 유일의 여잡니다. 당신에게 결코 피해가 가게는 안할 겁 니다. 그러려면 남자보다 여자가 유리하지요." 파파가 쥬엘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때 루루가 스프를 내왔 다. 루루는 어느나라에서나 파파의 집에 머물러있는 여자로 언제든 부담 없이 검은 양복입은 사람들을 불편없게 해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파파의 집마다 -- 하지만 모두 <루루>라고 불리고 이미지 자체도 조용하 여 편안함을 준다. "여자라... 그렇군. 열 세살 때까지만 해도 여자란 게 뭔지를 몰랐었 는데. 파파가 가르쳐주질 않았었어." "나약한 마음을 갖게 될까 봐서 그랬죠." "어째서? 파파가 여자란게 남자보다 훨씬 강하고 우락부락한 동물이라 고 가르쳤으면 난 그대로 믿었을껀데? 난 파파밖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으니까. 훈련이 끝나면 하나씩 던져주는 빵을 얻어먹으려고 이를 악 물고 해내곤 했지. 갇혀서 지내고 아침이면 파파가 와서 훈련시키고 빵 을 주고는 가 버리고... 한참 지나서야 그 빵에 온갖 영양분이 죄다 적 절히 들어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지." "여자가 강하다고 했다면 당신은 날 때려눕히고 탈출했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일단 남자가 강하다는 걸 알아버리면 다시 붙잡아 오더라도 이전 처럼 날 믿지는 않게 되었을테니까요." "그렇겠군. 난 파파를 너무나 믿어버렸어. 아침에 파파의 모습이 보이 면 너무나 반가와서 눈물이 나려고 그랬는걸. 물론 파파가 시키는 대로, 내색은 안했지만 말야." "당신이 아직 어릴때였으니까요." "파파는 가끔가다 일주일씩 안 오기도 하고 그랬었지. 난 그게 싫었 어. 정말 소름끼치게 싫었다구. 차라리 훈련하고 다치고 채찍은 맞을 망 정 파파가 안 오는 건 너무 싫었어." 파파가 겸연쩍은 미소를 띄었다. "당신은 여자치고는 정말 묘한 사람입니다, 쥬엘. 그 고생을 하고도 날 증오하지 않으니." "증오? 하하. 난 파파를 사랑하는 걸." 쥬엘은 스프를 접시채로 들어 마셔버렸다. "7시 45분이야. 준비해 두겠어." 파파는 돌아서서 나가는 검은 양복을 입은 쥬엘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7시 50분. 루루는 현관에서 빨간머리를 휘날리는 여자를 맞았다. 응접 실로 안내하자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던 파파가 고개를 들었다. "잘 오셨소. 미스 그랑디에." "이왕이면 마드모아젤로 해 주시지요. 같은 프랑스인이면서. 안녕하세 요, 무슈 피에르 애드윈 P.아담." "이런, 본명까지 알고 계시는군요. 능력은 인정됐으니 그렇게 실력발 휘 안 하셔도 괜찮은데. 게다가 미국에서 태어났으니 미국인이지요. 비 록 부모님 다 프랑스인이기는 하셨지만. 그렇게 생각지 않소, <미스> 그 랑디에?" "마리라고 부르세요." "뭐 화나는 일이라도 있었나? 눈에 불꽃이 이는군." "이번 일 때문에 애인과 결별했다구요. 영원히. 대체 다른 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니, 무슨 직업이 이렇지요?" "좋았어! 각오가 대단하군. 당신은 좋은 직업을 구한거야, 마리. 온 정신을 쏟아 이 일을 성사시켜 보라구. 금메달을 따게만 해 주면 되는 거야. 그것도 소질이 대단한 아이를 말야.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가 아니라 <딴 일이라곤 안 한다, 할 생각이 없다.>라고 마음이 바뀌게 될껄." "처음 만나는 사람한테 말투가 그래도 되는 거예요?" "마리라고 불러달라는 것은 이런 식으로 말해달라는 게 아니었나? <친 근하게> 말야." 분노로 불타는 마리의 눈을 바라보며 파파는 싱긋이 웃었다. 옅은 밤 색 머리칼이 이마로 흘러내려 약간 흐트러진 분위기가 더없이 매력적이 었다. "당신은 무례하기 짝이없군요. 하지만 멋있어요. 이건 정말이라고요." 164cm의 마리는 갑자기 발끝을 세워 파파의 목에 들러붙었다. 파파는 그러한 마리의 입술에 가볍게 키쓰해 주었다. 그리고 마리의 팔을 비틀 어 거칠게 떼어놓으며 잔인하게 웃었다. "자, 7시 55분이야." 8시 정각에 테니스복을 입은 마리와 쥬엘은 코우트에서 악수를 나누었 다. 마리는 등 중간쯤까지 내려와 있는 붉은 머리를 하나로 묶어 간편해 보였고, 쥬엘은 엉망으로 자라 어깨를 덮는 컷트머리에, 이마에 밴드를 둘러 의지가 강해보였다. "난 마리 그랑디에예요. 만나서 반가와요. 당신 이름은?" "쥬엘입니다. 키가 작군요." 마리는 쥬엘을 올려다보며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키가 큰 것과 테니스 코우치 능력과는 별로 상관이 없지요. 키가 크 다고 해서 모두 다 테니스를 잘 치는 게 아닌 것처럼." 쥬엘은 킥 웃었다. "왜 그렇게 흥분하죠, 미스 그랑디에? 난 내가 너무 큰 키라는 걸 말 했을 뿐이예요. 당신 정도가 알맞죠, 여자로서는." "이랬다 저랬다 제 맘대로군요. 어쨌든 각오해 둬요. 난 당신때문에 애인과 결별했어요. 초죽음을 만들어놓겠어요, 쥬엘." "좋을 대로 하세요, 미스 그랑디에." "마리라고 불러요." 마리는 미스라는 호칭을 무척 싫어했다. 그리고 이름을 부르는 것이 훨씬 친근감이 있어서 좋아했다. 아주 어려서부터 마리는 고독을 못견디 는 성미였고, 친근감 있는 친구들을 많이 갖고 싶어했었다. "당신은 몇살이예요, 마리?" "스물 하나." "젊군요." 둘은 코우트 양쪽으로 갈라서 섰다. 이렇게 젊고 키도 별로 안 크고, 멋부리는 걸 좋아할 것 같은 여자 하 나를 고르는데 5주일이나 걸렸다니. 그것도 파파가 말야. 무슨 일이건 한 달을 넘겨서까지 걸리는 적은 없었는데. "잘 부탁해요, 코우치." "O.K. 그럼, 우선 당신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 공 몇개 쳐 봅시다." 마리는 명랑하게 말했다. 생각만큼 무례한 아이는 아닌 것 같군. 마리가 서어브를 했다. 쥬엘은 받아치질 못했다. "바닷바람이 차군." 그리스 테일러가 나직히 말했다. "약간은. 하지만 견딜만 하잖아? 이제 금방 여름이니까. 지금은 해가 질 무렵이라 약간 싸늘해진 걸거야." 그리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나란히 바다를 바라보며 앉은 유토피 아가 말했다. 서서히 노을이 물들기 시작했다. 바다는 진홍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리스가 유토피아를 바라다봤다. 그 시선을 느낀 유토피아가 그리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한동안 서로의 눈을 바라 다보며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유토피아가 고개를 돌려 바다쪽을 바라다 보며 말했다. "너도 아버지의 재산이 탐나서 나와 가까이 하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대체. 너의 아버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 "그렇다면 어째서 그저께 면담할 때 경영대로 진학하겠다고 했지? 지 난달까지만 해도 건축과가 꿈이라고 하잖았어!" "유토피아, 네 머리가 노을에 물들어서 아주 빨갛게 보여. 그걸 알 어?" "그게 어쨌다는 거야?" "내가 널 -- 내가 네 곁에 있는 것은 순전히 너의 반짝반짝한 금발과 혼을 빨아들이는 것 같은 푸른 눈과 뽀얀 피부때문이야." "내가 남들보다 좀 더 예쁘게 생겼기 때문에? 그래서 곁에 있으면 다 른 남자들이 부러워하기 때문에?" 그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입가에는 상냥한 미소를 띠고서. 그리고는 바다를 바라다보는 유토피아의 얼굴 -- 노을때문인지는 몰라도 새빨갛게 물든 -- 을 양손으로 감싸안아 자기를 쳐다보게 했다. "너의 모든 것이 견딜 수 없이 좋아, 유토피아. 외모같은 건 별게 아 냐. 너의 웃음소리나 말투, 네가 생각하는 방식같은 게 전부다 나에게는 최고로 여겨진다구." "돌아가자. 감기에 걸리기라도 하면..." 유토피아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영원히 이대로 있고 싶었지만. "감기에 걸리면 내가 곁에서 간호해 줄께. 난 네곁에만 있을 수 있다 면 행복하니까. 너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어. 네가 필요 하다고 한다면 웨스트 민스터 사원에서 진주목걸이라도 훔쳐오겠어. 너 의 행복에 비한다면 그깟것쯤은 아무것도 아냐.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 지 알고 있지, 유토피아?" 유토피아가 고개를 보일듯 말듯하게 끄덕였다.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 었다. 세번째 엄마와 함께 사는 부잣집 외동딸 -- 유토피아는 늘 고독하 고 친구가 없었다. 그런데 그리스는 마음속으로부터 자신을 이해해주는 것이다. 이윽고 그리스의 짙은 밤색 머리칼이 유토피아의 얼굴을 가렸다. 차가 운 바닷바람이 유토피아의 긴 금발을 마구 휘날리게 했다. 크리스토퍼 프린스는 <한접시 더>에 앉아 있었다. 맞은 편에는 이 레 스토랑의 피아니스트 아가씨가 재미있어서 죽겠다는 표정으로 하고 크리 스토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귀엽다는 느낌을 주는 명랑한 아가씨였다. "마리의 친구시라면서요?" 크리스토퍼가 물었다. "친구요? 천만에요. 난 고용인이예요. 마리같은 여자가 무엇때문에 나 같은 여자를 친구로 사귀겠어요?" 피아니스트는 마티니를 한 모금 홀짝 마셨다. 한꺼번에 마셔버리기가 아깝다는 듯한 동작이었다. "난 마리로부터, 이 레스토랑의 피아니스트로서 받는 만큼의 보수를 받고 있었어요. 단지 당신을 감시 -- 이렇게 말해도 될까 몰라? -- 어쨌 든 당신이 와서 먹은 음식 따위, 만난 사람 등등의 자질구레한 것들을 알려주는 것만으로요. 당신은 적어도 한달에 두세번은 찾아오는 단골이 니까, 마리가 찾아올 때마다 보고할 거리가 있어서 좋았죠. 돈을 받는 것도 정당했고요. 그런데 마리가 그저께 -- 목요일에 갑자기 찾아왔더군 요. 계약을 파기하고 돌아갔어요. 이제 마리로부터는 땡전 한푼 받을 수 없게 됐어요. 이젠 그 금테안경과 마음놓고 만나셔도 난 신경도 안 쓸 거예요." "미스 로렌스 -- 당신이 말하는 금테안경 말입니다. -- 와는 이곳에 한번밖에 안 왔는데, 왜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우린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 "부끄러워하고 있군요. 귀여워라. 그 금테안경은 당신이 데리고 온 유 일한 여자 손님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여자 미인인데다 당신을 보는 눈길이 보통이 아니던 걸요." 크리스토퍼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완전히 틀리다고 할 수는 없는 말이었다. "마리와도 헤어졌다면서 뭘 망설여요." "아, 그때문에 찾아왔습니다. 그 고집센 여자가 갑자기 헤어져 주겠다 니 믿어지지가 않아서요." "바빠질 거래잖아요. 이탈리아 남부의 섬 하나를 받기로 하고 계약을 맺었다나, 머 그렇대요. 그것도 별장까지 딸린 섬으로요. 대신에 적어도 4-5개월정도는 아무일도 못하고 꼼짝없이 붙들려 있어야 한다나요. 그런 데 -- 마치 마리가 귀찮았었다는 듯한 말투시네요. 헤어져 주겠다니 믿 어지지가 않는다?" "섬하나요? 대체 무슨 일이길래..." "말을 돌리시는 군요. 뭐, 어차피 마리로부터도 해고됐으니 상관없는 일이지만. 음, 그말밖에 다른 말은 없었어요. 저도 궁금해서 자꾸 물어 봤지만 그걸 말하면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다면서 말하지 않던걸요." "짐작가는 바도 없습니까?" "없어요, 이거 고마와요." 피아니스트는 잔을 약간 쳐들어 보이더니 3분의 2쯤 남아있던 마티니 를 주욱 마셔버리고는 일어서며 말했다. "바보로군요, 마리는. 당신같은 사람을 고작 섬하나와 바꾸어 버리다 니." 저녁 8시 30분. 샤워를 마치고 검은 양복을 갈아입은 쥬엘은 식당으로 내려갔다. 언제나처럼 파파는 한가운데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헬로우, 파파" "건강해 보이시는군요, 쥬엘." 사실 쥬엘은 흠씬 지쳐있었다. 내색하지 않고 지내는 게 습관화 되지 않고 있었다면 지금쯤 코우트에 쓰러져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을 게 틀림 없었다. 그러나, 마리가 생긋 웃으며 <수고했어요.>라고 말할 때에 쥬엘 은 숨도 가쁘지 않은 듯 침착하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내색하지 않는 것 -- 그것이 파파가 가르쳐 준 인내의 비결이었 다. <힘들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에게는 힘들지 않는 일이란 없 다는 논리였다. "건강해 보여? 그렇겠지. <재미있는 훈련>을 마친 다음이니까." 파파는 쥬엘이 굳이 <재미있는>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는 굉장히 녹초가 되었을 때라는 걸 알고 있었다. 쥬엘은 조금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쥬엘이 단지 여섯살이었을 때부터 12년 가까이나 제 손으로 키워오다시피 했기 때문에 쥬엘의 말투 하나하나, 표정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뜻을 모조리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쥬엘은 슬플 때엔 고개를 숙 이고 킥킥거린다. 화가나면 왼손으로 앞머리를 뒤로 거칠게 넘기고, 기 분이 좋으면 오른손으로 넘긴다든지 하는 것들... 다른 사람이 보기엔 무감정해 보이는 일이었지만 파파는 너무도 생생하게 쥬엘이 내뱉는 감 정을 느끼곤 했다. 쥬엘은 <파파에겐 아무것도 감출 수 없다>고 생각했 고. "코우치가 꽤나 열심이었나 보군요." "응. 점심시간이 지나고 다시 코우트에 가 보니까, 어디서 가위를 빌 렸는지 머리를 쥐가 뜯어먹은 것처럼 잘라버리고 왔던걸. 덥대. 그리고, 이제 애인도 없으니까 좀 보기 안 좋아도 상관없다나. 하여간 그 머리자 른 꼴을 봤으면 파파도 두 시간은 웃어제꼈을 거야. 나야 그 <악마의 공>을 받아넘기느라고 2분밖에 못 웃었지만." "코우치가 마음에 드시는 것 같아 다행이군요." "파파가 선택한 여자인데 어련하겠어?" 쥬엘과 파파는 루루가 차례로 내오는 디너를 먹으며 그 다음계획을 이 야기했다. 낮동안에 파파는 단체의 이곳지사에 가서 경과보고를 받아온 모양으로 쥬엘에게 그 일을 알려주었다. 18세와 19세의 오스트레일리아 여자애 셋이 이곳으로 오게 될 거라는 것이었다. 지방쪽으로 분산시켜 전입시켜서 전국대회에서야 맞부딪치게 만들 모양이었는데, 어려서부터 프로를 지망하고 훈련되어온 전문가들로, 올 가을에 프로로 데뷔하려는 걸 내년 봄으로 미루게 하고 데려오기로 했다고 한다. 테니스의 왕국 오 스트레일리아에서 프로를 지망하는 여고생... "야, 그럼 나도 당해내기 힘들겠는 걸."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겁니다. 코우치가 워낙이 좋으니까요." 파파는 낄낄대고 웃었다. "파파, 근데 궁금한게 있어." 명랑하게 말했지만, 파파는 쥬엘이 심각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챘다. "또 뭡니까? 이제 계획은 완벽한데요." "그리스 테일러에 관한 보고는 왜 알려주지 않지?" "... 그가 두렵습니까?" "현재로서는 약간 그래. 아무것도 알고 있는 게 없으니까." "그건..." 파파가 망설이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건 아직 시기가 아닙니다. 기초적인 것, 이를테면 19세, 남자, 앨 런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 런던 이스턴 가의 로망 아파트 18동 708호 에서 형과 단둘이 살고 있음, 키 181, 몸무게 72, I.Q. 142, 부모 모두 2살 때 돌아가심... 따위의 자질구레한 것들을 알고 싶으신 건 아니겠지 요? 그리스 테일러는 당신 말대로 뭔가 꿍꿍이 속이 있을듯한 남자입니 다. 유토피아와는 굉장히 가까운 사이인 것 같은데, 그것 또한 무언가 목적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좀 더 윤곽이 드러날 때까지는 아무 것도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10월달의 전국대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 지 않습니까? 조금 더 참아주십시오." "알겠어. 하지만 너무 늦어버리는 일이 있어선 안 돼." "물론입니다. 결코 실수가 있어서는 안되지요." 식사가 끝났다. 쥬엘은 조용히 일어나서 식당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다 보며 파파는 공연히 연민의 정 같은 걸 느꼈다. 열 여덟 살, 이 제 한참 싱싱하게 웃고 떠들 나이인데... 마리 그랑디에라는 여자에 비 하면 얼마나 불행한 아이인가. 속과 겉이 완전히 다르게, 속에서 계산된 행동만을 겉으로 나타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안되지. 이런 생각 은 금물. 쥬엘은 이런 식으로 살아가도록 훈련되고 자라난 거야. 나와 마찬가지로. 나보다 꼭 열살 어린 여자아이를 내 손으로 저렇게까지 만 들어 놓았으니, 후회할 것도 동정할 것도 없지. 처음에는 나도 너무 어 렸으니까 너무 과격하게 다루었는지도 모르지만. 아니야, 아무것도 잘못 된 것은 없어. 저 아이는 철저하게 <나처럼> 되어가고 있을 뿐이니까. 율리아 로렌스는 <한접시 더>에 앉아 있었다. 저녁 9시 경에 불현듯 이곳으로 오고 싶어진 것은 무엇때문일까? 커피 한잔을 붙들고 혼자 앉 아 한 시간 가량 앉아있는 사이, 그녀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주말. 크리스토퍼와 함께라면 얼마나 멋진 주말을 보낼 수 있었을까? 벌써 열시 15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한접시 더>는 정각 열 두시에 문을 닫는데, 주말이라 도시안에 남아있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유난히 한가했다. 갑자기 앞자리에 누군가가 앉았다. 귀여운 인상을 주 는 여자였다. 방글거리며 앉은 여자는 술잔 두 개를 내려놨다. '스물 두살쯤 되었을까? 좋은 나이로군.' 율리아는 갑자기 자기가 아직 스물 네살 밖에 안되었다는 사실을 깨닫 고 흠칫 놀랐다. 두살 차이밖에 안 나는 데 난 마치 할머니 같군. "드세요." 피아니스트는 잔 하나를 율리아 앞에 옮겨놓았다. "포도주예요. 1823년산. 이탈리아식 정찬에 쓰이는 거예요." 율리아는 왠지 놀라지도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이탈리아 식 정찬 -- 크리스토퍼와 함께 이곳에서 먹었던 요리. 앞에 앉아있는 여 자에게 싱긋이 미소를 짓고는 잔을 들었다. "고마와요. 잘 마시겠어요." "기분이 좀 나아지시길 바래요. 조금 있으면 그 남자가 올테니까 좀 더 예쁜 얼굴로 맞아드려야지요." 율리아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포도주잔을 채 비우기도 전 에 크리스토퍼가 두리번거리며 입구를 들어서는 게 보였다. 율리아는 모 른 체 했지만, 크리스토퍼는 잠시 멈칫 하더니, 곧장 율리아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아무 말없이 맞은 편에 앉아있던 아가씨가 벌떡 일어나 크리 스토퍼에게 고개를 까닥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 크리스 토퍼가 앉았다. "좋은 밤이군요, 로렌스 선생님. 오늘 밤은 <율리아>라고 불러도 되겠 습니까?" 율리아는 들릴듯 말듯하게 <그러세요>하고 대답했다." "오다가 보니 달이 아주 밝더군요. 드라이브라도 하시면 어떨까요? 제 차는 좀 낡긴 했지만 아직은 잘 달린답니다. 포도주는 한 잔 정도면 충 분하지 않습니까?" 율리아는 기절할만큼 놀랐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이사 람? "거절하시는 건가요? 별 수 없군요. 밤중에 차를 몰고 달려온 성의를 거절하실 만큼 제가 맘에 안 드시는 모양이지요." "아, ... 아니예요, 그런건." 결국 1시간 가량의 드라이브 후에 크리스토퍼는 정중히 집앞까지 태워 다 주었다. "오늘은 감사했어요." "천만에요. 오늘은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딱딱하고 거만하고 냉정한 여자 율리아 로렌스와 함께 있는 걸 즐겁다 고 말해 준 사람은 여지껏 한 사람도 없었는데... 율리아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하려 심호흡을 일곱번쯤 한 후에 초 인종을 눌렀다. 새벽 1시경에 전화벨이 울렸다. 크리스토퍼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어때요, 데이트는 즐거우셨어요?" "당신 대체 무슨 심보야! 날 열렬히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마 리인줄 알고 가보니 그 금테안경 율리아 로렌스라니." "당신은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잔소리말고 끊어! 난 어떤 여자도 좋아하지 않는다구. 다시 또 우리 집에 전화를 하거나 하면 가만 놔두지 않겠어!" 크리스토퍼는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고 침대에 걸터앉아 어둠속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결국 마리를 사랑했던 것일까?' 크리스토퍼는 자신의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귀찮던 여자 였는데, 일단 헤어지고 나니 한없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마리에 비하면 율리아 로렌스 따위는 여자도 아니지.' 율리아 로렌스는 뻣뻣하기 이를데 없었고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게 고작 으로 말이 없고 내성적이었다. 예의상 데이트 신청을 하기는 했지만 10 분이 지나자 지겨워지기 시작했었고--. 마리는 귀찮기는 했지만 한번도 지겹거나 지루하게 하진 않았었다. '모르겠다. 어차피 마리와는 헤어진걸. 그래도 율리아 로렌스는 결코 가까이 할 만한 사람이 못 돼. 바보같은 여자야. 그래, 난 어떤 여자도 좋아하지 않았었어. 마리 외에는.' 갑자기 크리스토퍼의 머리에 쥬엘 오스몬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쥬엘? 쥬엘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만한 녀석이지. 괴팍한 점이 나 랑 비슷하니까. 그렇지만 여자로서 좋아한다는 것은 아니야.' 왜 쥬엘이 떠올랐는지 이상하게 생각하며 크리스토퍼는 그대로 앉아있 었다. 쥬엘의 분위기는 -- 마치 <신사>의 분위기처럼 친근감을 준다. 냉 정한 것 같으면서도 왠지 친근감이 드는 존재. 마리와 쥬엘은 정반대의 성격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그러한 친근감이었다. 형제같은 느낌이 드 는 친근감... 담배를 꺼버리고 벌렁 드러눕자, 크리스토퍼는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PART 4. 여름 사건 I. 여름방학에 관한 이야기가 슬슬 학생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고 있 었다. 열흘 남짓 남은 여름방학에 대한 계획들은 제각기 달랐고, 또 저마 다 꿈에 부풀어있었다. 두달 반 동안의 여름 방학 중 한달 반 정도의 아 르바이트로 돈을 벌어 나머지 한달동안 휴가를 만끽하겠다는 아이들이 대 부분이었다. 그동안 앨런 사모아 고등학교의 테니스 부원들 중 7명은 피땀나는 연습 을 해야한다. 지난 6월 20일에 있었던 지구대회에서 무사히 메달을 따낸 7명이다. 앨런 사모아 고등학교는 모두 12명의 부원을 출전시켰는데 그중 다섯명 만이 탈락했다. 여름 방학이 끝나자마자 9월말에 지역대회가 있고 다시 10월 중순경에 전국대회가 있게된다. 지역대회에 출전할 7명 안에는 남자 네 명과 여자 세 명이 포함되어 있 다. 남자 네명은 단식에 그리스 테일러와 앨런 듀트 -- 앨런 사모아 고등 학교 이사장의 둘째 아들 -- 였고, 나머지 둘은 복식조로서 무사히 은메 달을 따내서 출전권을 얻었다. 여자 세명은 유토피아 피렌과 쥬엘 오스몬 드, 그리고 욜라 빙거라는 스웨덴 아이였다. 유토피아는 단식과 복식에서 2관왕이 되었고, 욜라 빙거는 유토피아와 함께 복식으로 출전해서 당당히 금메달을 땄다. 쥬엘은 동메달에 그쳤다. 유토피아와 게임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결승전 진출을 사양하기 위해서였다. 유토피아와는 전국대 회에서 마주쳐야만 하니까. 그동안 쥬엘은 코우치와 퍽이나 가까와져 있었다. 코우치가 말하는 의 미를 가장 먼저 이해하는 것은 쥬엘이었고, 쥬엘이 하고 싶어 하는 걸 곧 알고 도와주는 것은 코우치였다. 둘은 원래부터 친했던 친구처럼 아주 마 음이 맞았다. 또 유토피아와 쥬엘 사이도 무척이나 가까와졌다. 유토피아 는 자기가 공부하던 <경영학 입문> 따위의 도서를 빌려주었고, 주엘은 대 충 훑어서 두세 가지의 질문 거리를 찾아가 묻곤 하는 사이에 마치 자매 처럼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이었다. 7월 1일부터 9월 17일까지의 기나긴 여름방학. 그 사이에 과연 어떤 일 이 벌어지려 하고 있는 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쥬엘 오스몬드는 소파에 앉아 탁자 위에 긴 다리를 뻗어 올려놓고는 커 다란 책을 읽어내려가고 있었다. <경쟁사회에서의 경영자의 역할>이라는 책으로 이틀전에 유토피아가 빌려준 책이었다. 아파트는 그런대로 봐줄 수 있을 정도로 수선되어 있었다. 3주일쯤 전부터 이 집에 살게 된 마리 그랑디에가 무서운 정열을 갖고 고쳐놓은 것이었다. 소파는 아예 새로 중 고품을 사서 배치했고 바닥에는 낡긴 했지만 카페트도 깔았다. 전체적으 로 벽마다 하얀 페인트 -- 페인트 값이 가장 싼 색깔이니까 -- 를 손수 바르기도 했다. 약간은 병원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하수도 같은 것 보다야 백 배 나았다. 마리는 늘 이 아파트를 <소름끼치는 아파트>라고 부르며 시간과 돈을 투자해 개선해 나갔다. 캐더린이 찾아왔을 때 쥬엘은 <우리 사촌언니>라고 소개했다. 캐더린은 마리의 붉은 머리를 보고 무척 반가와했다. 모처럼 같은 머리색을 가진 사람을 만났기 때문일까? 적당히 빨간 사람은 꽤 됐지만, 마리나 캐더린 처럼 <지나치게> 빨갛고 반짝반짝한 머리는 드물었으니까. 물론 마리에 비하면 캐더린의 머리색깔은 조금도 빛나보이지 않을 지경이었지만. 어쨌든 마리는 쥬엘과 함께 이 아파트에 살고 있고, 지금은 샤워중이 다. 쥬엘이 책장을 한 장 더 넘겼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쥬엘?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왠일이야, 파파. 급한 일이라니?" "당신이 필요합니다. 내일 이곳으로 와주셔야겠습니다. 주위 사람들과 의 관계는 대충 정리해버리십시오." "학교는 어떡하고? 일주일만 있으면 방학인데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 어?" "바보같은 소리 하지 마십시오, 쥬엘. 그렇게 여유있게 처리될 수 있는 일이라면 굳이 당신까지 동원하지도 않습니다. 내일 저녁 6시 비행기를 예약해 놓았으니까 내일 학교에 가서 적당히 처리할 시간쯤은 충분할 겁 니다. 자퇴서를 내버리든지, 어쨌든 알아서 하십시오." "거기 어디야? 이거 장거리 전화야?" "여긴 리용입니다. 지금 곧 알프스 산맥으로 출발할 참입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그렇게 급한 일이면 지금 바로 날아갈께. 학 교 따위야 아무려면 어때. 어차피 진짜 학생도 아닌걸." 파파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기상상태가 안 좋아서 내일 오후 4시쯤까지는 비행기가 뜨지 못한다더 군요. 안개가 심한데다가 바람이 세서 말입니다." "역시 파파로군. 못당해." "리용 공항에 차를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바로 알프스쪽으로 오실 수 있도록. 비행기표는 루루에게서 받으세요." "무슨 일인지 힌트 좀 줄 수 없어?" "패싸움이라는 게 맞을까요. 이탈리아 조직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자칫 하면 우리측 인원이 반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만 알아두세요. 나머진 알프스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유토 피아의 일은 후에 일이 잘 처리 된다면 다시 이용할 수 있도록 일단은 기 분좋게 헤어져 두는 것이 좋을 겁니다." "O.K." "지금 출발합니다. 끊어야겠군요." "행운을." 쥬엘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소파에 깊숙히 기대앉아 다리를 탁자위 에 얹고 <경쟁사회에서의 경영자의 역할>을 펼쳤다. 그때 목욕가운을 입 은 마리가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며 욕실에서 나왔다. "무슨 일이예요, 쥬엘? 아니, 탁자 위에는 절대로 발을 올려놓지 말라 고 그랬죠? 빨리 내려요! 당신같은 사람들 때문에 아파트가 시궁창처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쥐가 나오죠!" 마리의 목소리는 앙칼졌다. 쥬엘은 천천히 책을 탁자 위에 엎어 놓고 다리를 내렸다. "전화가 온 것 같았는데... 아니었나요?" "맞아요. 왔었어요." "무슨 내용이었길래 그렇게 심각해요?" "별로... 당신한테 휴가예요. 나 내일 여행을 좀 가야하겠거든요. 휴가 기간은 두주일로 해 두겠어요. 그 후엔 이 아파트로 돌아와 있어요. 연락 할테니까요. 그때까진 아무 일이나 좋은 대로 실컷 해 둬요. 그러니까... 7월 9일 저녁때쯤까지만 돌아오세요." 쥬엘은 맞은 편 벽에 걸려있는 달력을 확인하면서 말했다. "나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지금은 파트너도 없는데..." 마리가 생긋 웃으며 말했으나, 쥬엘은 냉정했다. "그 쥐뜯어 먹은 것 같은 머리의 사람과 같이 다니자면 얼굴이 뜨거워 서 아무것도 못할 거예요." 마리가 머리카락을 닦던 수건을 있는 힘껏 쥬엘의 얼굴에 내던졌다. 쥬엘은 자퇴서를 들고 율리아 로렌스의 싸인을 받으러 갔다. 율리아는 몇마디 자질구레한 것들을 물어보더니 별말없이 싸인을 해주었다. "어딜 가든지 행복해요, 쥬엘." "감사합니다, 미스 로렌스." 교장선생님 싸인까지 무사히 받은 쥬엘은 자퇴서를 서무계에 제출하고 테니스부로 향했다. 코우트 안의 벤치 위에 <경쟁사회에서의 경영자의 역 할>을 놓은 쥬엘은 수첩을 찢어 쪽지를 썼다. '유토피아, 책 잘 봤어요. 고마와요. 얼마 안 되는 기한이었지만, 당신 같은 멋진 선배를 만날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언제고 다시 만나게 되더 라도 모른 척 하지는 말아주세요. -- 쥬엘 --' 코우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오전 10시 반. 모두들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게다. 지금은 역사시간이겠지. 쥬엘은 잠시나마 진 짜 고등학생이 되어봤던 지난 석달간을 천천히 되씹으며 코우트를 가로질 러 운동장으로 통하는 문을 향해 걸었다. 말도 없이 떠났다는 걸 알면 캐 더린 피킨즈가 가만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마구 화를 내고, 또 한참 쓸 쓸해 하겠지. 그래도 제법 마음이 통하는 친구였는데. 별안간 쥬엘은 무엇인가에 세게 부딪쳐서 뒤로 넘어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코우트 안으로 뛰어 들어오던 코우치였다. 한손엔 크림색 봉투를 들 고 있었는데 -- 쥬엘의 자퇴서였다. 크리스토퍼의 머리칼은 온통 흩어져 있었다. 그 넓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려온 모양이었다. 숨을 약간 가쁘 게 쉬고 있었다. "왠일이예요, 코우치? 100m 달리기 연습이라도 했나요?" 쥬엘은 천천히 일어서서 모래를 털어내며 말했다. "자퇴한다는 건 무슨소리지?" 크리스토퍼의 목소리는 노기로 가득 차 있었다. 크림빛 봉투를 본 쥬엘 의 얼굴빛이 변했다. "이리 줘요!" "그렇게는 안 돼. 대회까지 얼마나 남았다고 자퇴한다는 소리가 나오 지?" 평소에 푸른 색이던 코우치의 눈이 거의 보라색에 가깝게 변해있었다. 그건 무지무지하게 화가 나 있다는 증거였다. 코우치는 크림색 봉투를 양 손으로 잡고 짜악 찢어버렸다. 쥬엘은 더이상 참지 않았다. 코우치의 얼 굴에 주먹을 날렸다. 코우치는 비틀했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쥬엘의 두 번째 주먹이 코우치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코우치도 주먹을 날려왔다. 뒤 죽박죽 섞여가며 그들은 싸우고 있었다. 코우치건 제자건, 남자건 여자 건,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그저 서로가 분노로 가득차서 주먹을 휘둘러 대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바닥에 쓰러져버린 쥬엘은 일어나다가 도로 주저앉아 버렸다. 코우치가 땅에 떨어져 있는 두조각난 봉투를 집어들고 쥬엘 곁에 와서 앉았다. 말없이 반쪽을 쥬엘에게 건네주고는 나머지 반쪽 을 아주 갈기갈기 찢어버리기 시작했다. 잠시 바라보던 쥬엘도 들고 있던 반쪽을 찢기 시작했다. 바닥은 온통 종이조각으로 널부러져버렸다. "청소를 해야겠군. 어떻게 하겠나? 코우치를 부려먹겠나?" "병주고 약주는 군요. 청소까지 하라고 하면 정말 자퇴해 버릴거예요. 음, 자퇴하고 청소부로 취직할 수는 있겠지만." "자아식. 넌 학교에 안 나오더라도 일주일 결석밖에 안 돼. 여름방학동 안에 어떻게든 사정을 처리하고 가을학기부터 다시 학교에 나올 수도 있 잖아." "그래요. 일주일간 결석이지요. 물론 테니스 합숙도 빠지고요." "이녀석 정말 무슨 일이 있었나보군 그래." "쥬엘은 무릎을 세우고 턱을 괴었다. 아직도 약간은 숨이 가빴다. 파파 에게 말고는 날 이렇게까지 지치게 만든 주먹은 없었는데. "코우치, 나 당신주먹 맘에 들었어요." "너같은 녀석이 여자애라니..." 코우치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동안 쥬엘과 꽤 친하게 지냈음 에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 그럼, 전 그만 가볼래요. 합숙 열심히 해서 전국대회 금메달을 모 조리 휩쓸어오길 빌께요." 쥬엘이 일어서자 코우치도 따라 일어섰다. 쥬엘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당신같은 친구를 사귈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코우치." "너같은 괴짜를 만나 즐거웠다, 이 악마녀석아." 쥬엘이 씁쓸하게 웃었다. "안녕." 쥬엘은 느리게 손을 흔들고는 코우트를 나섰다. 코우치는 쥬엘의 뒷모 습이 가냘프다고 생각했다. 물론, 주먹은 너무 세지만. 코우치는 아직도 얼얼한 턱을 어루만졌다. 교문앞에는 검은 리무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쥬엘은 리용행 <에어프랑스>기에 앉아있었다. 프랑스 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알프스는? 이탈리아 조직이란 뭘까? 유토피아의 아버지와 관련된 조직은 아닐까? 곧 안내방송이 울려나와 안전벨트를 매라고 했다. 쥬엘이 안전벨트를 막 매자마자 어떤 남자가 헐레벌떡 기내로 뛰어들었다. 함부로 흐트러진 머리칼에 헐렁한 바지와 티셔츠 차림이었는데, 스튜디어스에게 미안하다 는 듯 고개를 까닥하더니 곧장 쥬엘쪽으로 걸어왔다. 쥬엘의 옆자리는 아 직 비어있었고, 그는 거기에 털썩 앉아 다리를 꼬고 몸을 뒤로 기댔다. 삼십대 초반쯤으로 보였는데, 짙은 밤색 머리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그리 스 테일러의 머리색깔과 꼭 같구나. 쥬엘은 그 사람을 힐긋 쳐다보며 생 각했다. 갑자기 그 사람이 쥬엘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청록색 눈 역시 그리스 테일러와 꼭 같았다. 그런데도 별로 닮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리 느는 날카로운 이미지를 지녔는데 이 사람은 둥글둥글하고 원만할 것 같 은 온화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손으로 머리칼을 뒤로 젖혀 넘 기면서 말을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합시다." "그러시죠. 전 오스몬드예요." 쥬엘은 성만 밝혔다. 어차피 네시간 비행후에 헤어질 사람이니까. "듀렌 테일러라고 합니다." 말하면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쥬엘이 마주 잡았다. 커다랗고 따스한 손이었다. 듀렌 테일러가 미소를 지었다. "키나 체격에 비해 손이 무척 여린 편이군요. 보기보다 굉장히 부드러 운데요." "그렇겠죠. 전 콜드크림 회사에 다니고 있으니까요" 듀렌 테일러의 커다랗게 뜬 놀란 눈동자를 바라보며 쥬엘은 소리내어 웃었다. 듀렌도 드문드문 따라 웃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했다. 쥬엘은 듀렌 테일러가 그리스 테일러와 성까지 꼭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언젠가 파파가 그리스 테일러에 관해 '기초적인 것'을 말했던 기억을 되 살렸다. '런던 이스턴가의 로망아파트에서 형과 단둘이 살고 있음. 부모 모두 2살때 돌아가심...' 스튜디어스가 와서 듀렌 테일러에게 안전벨트를 매라고 약간 신경질적 으로 말했다. '아니야, 단둘이 사는 형이라기엔 나이가 너무 많아보여.' 쥬엘은 부질없는 생각을 지워버렸다. 이 기분좋은 사람에게서 무슨 의 심거리를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설사 그리스의 형이라고 해도, 그리스 의 소위 <꿍꿍이 속>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거야.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 가슴속에서 파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비행기 안에서 만큼은 긴장을 풀고 싶었다. 비행기가 이륙했다. 듀렌 테일러는 활기차고 말재주가 좋았다. 마리 앙뜨와네뜨의 머리 색깔서부터 미국 거지가 주로 피우는 담배의 상표까지 화제에 오르는 동안 쥬엘은 완전히 기분이 좋아 졌다. "이름을 말해주지 않겠어요, 미스 오스몬드?" 쥬엘은 잠시 망설였다. 이번만은 아무도 믿어선 안된다는 파파의 충고 를 따르기로 했다. "올리비아. 올리비아 오스몬드예요. 둘다 로 시작하니까 손수건에 이니셜도 못해놓지요. 나란히 < O O > 라고 써 놓은 걸 보고 누가 이니셜 이라고 생각하겠어요? 돼지 콧구멍인줄 알지." 듀렌이 미소지었다. "올리비아라고 불러도 괜찮을까요?" 쥬엘은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그냥 오스몬드라고 불러주세요. 전 그 이름을 그다지 좋아하 지 않거든요." 듀렌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엷게 스쳤다. "그럼, 이건 어떨까요. 쥬엘(Jewel)이라고 부르는 건요. 당신 눈동자는 단순히 푸른 색이 아니라 온갖 보석의 색을 섞어서 만들어 놓은 것 같은 푸른 색이거든요." 쥬엘은 지나치게 놀랐지만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쥬엘이 영어로 보석이라는 뜻이라는 걸 교묘히 빗대어서 말하긴 했지만, 어쨌든 간에 이 사람은 쥬엘을 알고 있는 게 틀림 없었다. 쥬엘은 약간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너무 과분하군요. 하지만 좋으실대로 하세요." 쥬엘은 6살때 처음으로 파파를 만났을 때를 상기했다. 아버지가 납치되 어 가고 엄마가 살해되었을 때. 그 때 파파는 쥬엘을 목마 태우고 파파의 집으로 데려갔었다. 그리고 쥬엘의 본명을 완전히 무시하고 다짜고짜로 쥬엘 실버 오스몬드라는 이름을 갖다 붙이고는 창고에 가두어 버렸었다. '쥬엘, 당신 눈은 온갖 보석의 색깔을 다 합쳐 놓은 것 같은 푸른 색이군 요. 그러니까 쥬엘이라는 게 가장 어울리는 이름이 될 겁니다. 이전의 기 억은 모조리 잊어버리세요. 당신 자신에게 유익하도록.' 과거를 기억할 때마다 몽둥이로 열 두대씩 얻어 맞았다. 그리고 6시간 을 뛰어야 했다. 전의 이름을 불렀을 때에 고개를 돌리거나 하면 더 크게 혼이 났다. 쥬엘은 완전히 <쥬엘 실버 오스몬드>로서 익숙해져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실버>라는 가운데 이름은 쥬엘의 실버 블론드 머리칼을 보 고 파파가 만들어 붙인 거였다. 열 세살때 이후로는 줄곧 지금처럼 검게 염색하고 있기는 하지만. 비행기는 어느새 파리 상공을 날고 있었다. 잠시 딴 생각에 잠겨 있는 쥬엘을 바라보던 듀렌 테일러는 쥬엘의 가슴께로 시선을 옮겼다. 짙은 곤 색 넥타이에 꽂혀 있는 은 수공예품 넥타이핀. 듀렌은 갑자기 손을 뻗어 넥타이핀을 뽑았다. 쥬엘은 얼른 빼앗으려 했지만 끄트머리를 눌러 위급 시에 쓰는 전자파 신호를 발신하는 게 고작이었다. 듀렌은 쥬엘을 무시한 채 넥타이핀을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야, 이거 굉장한 솜씬데요. 값이 꽤 나가겠어요." 쥬엘은 뒷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듀렌 테일러는 그 넥타 이핀이 무얼 의미하는 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쥬엘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고서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때요? 아직 저녁 안 먹었죠? 리용 공항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좋 은 식당을 알고 있는데, 같이 저녁을 먹어 주면 이걸 돌려 드리지." 듀렌은 자못 친절하다는 듯이 웃었다. 주위에 앉은 승객들은 자고 있거 나 무심하거나 그저 빙긋이 웃거나 하고만 있었다. 듀렌같은 친절한 남자 가 단순히 한 여성과 식사를 하고 싶다는 의향으로만 들릴 대화였다. 이 미 밤 10시가 가까와오는 시간이었다. "약속이 있어서 안되겠는데요, 테일러씨." "아, 그래요? 이건 별로 소중한 것이 아닌 모양이군요." 듀렌은 넥타이핀을 쥬엘의 코앞에 들고 가만이 어루만졌다. 대체 어쩌 자는 걸까? 날 납치하자는 걸까? 쥬엘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하는 크리스토퍼 프린스를 10살 남짓한 주근깨 투성 이 신문배달아이가 붙들었다. "신문 한 장 사세요." 크리스토퍼는 귀찮다는 생각을 하면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스포츠 신문으로 한 장 다오." 그러나, 동전을 받아든 꼬마가 내민 것은 보통 신문이었다. "그걸로 보셔야 해요." 꼬마는 싱긋 웃고는 동전을 호주머니에 넣더니 내빼버렸다. 크리스토퍼 는 얌전히 받아든 신문을 펼쳤다. 전에 <신사>의 밑에 있을 때에 그런 식 으로 소식을 전달한 적이 여러번 있었던 것이다. 언듯 쥬엘이 뭔가 메세 지를 전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고란을 펼치자 곧 찾아 낼 수 있었다. <쥬엘의 휴가. 프랑스의 알프스. 여름에는 산이 최고라구요.> 크리스토퍼는 씨익 웃고는 신문 뭉치를 곁의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그 리고 학교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역시 쥬엘과는 어딘가 통하는 데가 있 다고 생각하면서. -- 이번 여름 합숙은 프랑스 남부에서 하려고 계획중이 었는데. PART 5. 알프스 쥬엘은 알프스로 향하는 시퍼런 폭스바겐 안에 앉아있었다. 오전 10시. 해는 거의 하늘 가운데까지 닿아 있었고 날씨는 그야말로 <여름>이었다. 이글거리는 습한 공기속을 가로지르는 시퍼런 폭스바겐은 그야말로 형사 콜롬보 저리 가라다. 금방이라도 바퀴가 빠져나가 주저앉아버릴 것 같았 고, 저 뜨거운 태양 아래서 녹아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 으니까. 쥬엘은 말없이 앞만 보고 앉아있었지만, 차안은 노랫소리로 시끄러웠 다. 뒷좌석에 앉아있는 두명의 이탈리아인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었 다. 쥬엘의 옆자리 -- 운전석 -- 에 앉은 듀렌 테일러도 그들의 노래소리 에 맞춰 휘파람을 불어대고 있었다. 무표정한 쥬엘에 비해 다른 세 사람 은 즐거워 못견디겠다는 듯 했다. 얄밉게도. 어젯밤 10시 넘어서 리용 공항에 도착하자, 쥬엘은 검은 리무진이 대기 하고 있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듀렌 테일러에게 이끌려 반대편 출구로 나 갈 수 밖에 없었다. 그저 넥타이핀에서 발신되는 전파가 어서 빨리 파파 에게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리용에 있는 <파파의 집>에서도 전파 수신 장치는 24시간 켜져 있을 테니까, 지금쯤은 누군가가 주파수를 읽어 서 위기에 처한 것이 쥬엘이라는 것을 파파에게 알렸을 것이었다. -- 넥 타이 핀에서 발신되는 전파는 휴대용 탐지기로 추적하면 계속해서 쥬엘의 위치를 알려주게 될 것이었다. 리용 공항을 벗어나자 듀렌 테일러는 택시 를 잡았다. 10여분쯤 달린 후에 그들은 음식값이 굉장히 비쌀 것같은 음 식점에 닿았다. 이탈리아식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크고 화려한 곳이었 다. 쥬엘은 듀렌의 티셔츠와 바지가 이 레스토랑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아무말 없이 따라 들어갔다. 넥타이핀은 줄곧 듀 렌의 왼쪽 네째 손가락과 다섯째 손가락으로 꼭 감싸여 있었다. 호주머니 같은 데에 넣어두거나 하면 쥬엘더러 가져가라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 테일러씨,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이시로군요." 나이 많은 이탈리아인 지배인이 듀렌을 반갑게 맞아 정중히 안쪽의 4인 용 테이블로 직접 안내했다. -- 그 헐렁한 차림새에도 불구하고! 넥타이핀에 대한 생각만 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즐거운 식사가 되었을 것이었다. 식당은 아주 깨끗하고 분위기가 좋았으며 요리도 일품이었다. 듀렌 테일러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재치가 뚝뚝 넘쳐 흘렀고, 신선했다. 쥬엘은 기분좋게 대꾸하기도 하고 질문하기도 했다. 듀렌은 농담이 먹혀 들어가는 사나이였다. "여기는 음식값이 꽤 비싸겠네요." 쥬엘은 불쑥 생각이 나서 말했다. 깔보는 투는 아니었지만 쥬엘의 눈동 자는 어느새 듀렌의 차림새를 훑고 있었다. "비싸죠. 왜요? 당신더러 음식값을 내랄까봐 겁이 납니까?" "아뇨. 다음에 이탈리아 음식이 먹고 싶어지면 당신을 찾아야만 되겠구 나 싶어서요." 쥬엘은 얼른 환하게 대답했다. 듀렌이 껄껄 웃었다. "별난 아가씨야. 이탈이아에 가 본적이 있습니까?" "아뇨. 전혀요. 프랑스도 처음인걸요." 사실은 조금도 그렇지 않다. 이탈리아에 있는 파파의 집에서는 13세때 부터 15세 사이에 20개월간 머물러 있었으니까. 열 세살 -- 그 나이는 쥬 엘이 검은 양복을 입기 시작한 나이였고, 파파이외의 다른 사람을 만나기 시작한 나이였다. 이탈리아의 파파의 집에 머무는 동안에는 집 안보다는 집 밖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 20개월 동안에 그녀가 중점적으로 훈 련받은 것은 도둑질, 소매치기, 사기술, 그리고 심리학이었다. 뭐니뭐니 해도 사기술과 소매치기 등의 분야에서는 이탈리아인들이 월등하니까. 이 탈리아인들은 깨끗이 훔쳐간다. 치사하게 쓸모있을 법한 물건만 쏙 빼서 훔쳐가지는 않는다. 라디오를 훔쳐가려면 그 근처의 과자봉지 같은 것은 다 주워주고 훔쳐가는 것이다. 뭔가 단순히 남의 물건을 갖는다는 것을 떠나, 하나의 예절이 깃들어 있는 것이 이탈리아의 도둑질이자 사기술이 었다. 이탈리아에 막 도착했을 때엔 납치당한 아빠를 찾겠다고 난리를 부 렸지만, 곧 파파의 말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되자 얌전하고 착실하 게 훈련만 쌓았다. 이탈리아인인 지코라는 40대 아저씨가 주로 쥬엘을 가 르쳤었다. 지코 -- 그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뭐니뭐니 해도 파파가 선택한 사람이니까. 프랑스에선 2년전에 4개월간 머물렀었다. 순전히 '이건 1572년산 브로 나쥬 포도주군요.'라고 말할 수 있는 귀족적 고상함을 갖추기 위해. 에밀 리라는, 손가락마다 반지를 두 개씩 낀 여자가 스승이었는데, 쥬엘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을 가리고 포도주를 마시게 했었다. 취하는 기미가 보이면 토하게 하고 술 깨는 약을 먹여가면서. 그 4개월이 끝나고 스페인 으로 가게 되었을 때엔 알콜중독 기미가 나타나 꽤나 고생하기도 했었다. 물론 그 다음 훈련이 시작되자 그따위 초기 증세는 곧 말끔히 사라져버렸 지만. 그때 이후로는 왠만한 술로는 취하지 않는 체력도 보유하게 되어서 파파의 의견으로는 <일석이조>라는 것이었다. "프랑스도 처음이시라고요? 그럼 영국에서만 계속 사신 겁니까?" "처음에는 뉴욕에서 살았어요. 지난 봄에 영국으로 왔고요. 아버지가 전근을 하셨기 때문에 별 수 없이 따라온 거죠." "아, 아버지와 함께 사세요?" "아뇨. 돌아가셨어요." 쥬엘은 약간 서글픈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약간 숙였다. 그래, 지 금 난 앨런 사모아 고등학교의 장학생 쥬엘 오스몬드니까. "혼자 사십니까, 그럼?" "아뇨. 둘이 살아요." 듀렌이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엄마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군요." "아녜요. 엄만 더 어릴 때 돌아가셨는 걸요. 함께 사는 건 친구예요." 쥬엘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대답해 버리고는 샐러드를 먹기 시작했 다. 그때였다. "여어, 듀렌. 왠일이야, 이게. 진짜 오랜만이로군." 잠바를 걸친 편안한 차림새의 사내 둘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듀렌이 벌떡 일어났다. 얼굴에 못견디게 반갑다는 듯한 표정을 띠면서. 그들은 이탈리아 말로 한참동안 무슨 말을 주고 받았다. 쥬엘은 못 알아듣는 척 하며 얌전히 앉아 있었다. 안부를 묻고 어쩌고 하는 별것 아닌 내용 -- '그리스 녀석은 잘 있나?'라는 말을 제외하면 -- 이긴 했지만, 듀렌이 프 랑스에 온 것이 근 3년만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 참, 소개해야겠군요. 쥬엘, 이쪽은 내 오랜 친구 루엔 콜리, 스파 트 피렌. 그리고 이쪽은 올리비아 오스몬드라고 하지. 비행기에서 만난 친구라네." 갑자기 듀렌이 영어를 써서 말했다. 두 이탈리아인들도 영어에 익숙한 듯 영어로 인사를 나누었다. 이게 우연이 아닌, 조작된 만남이라고 느끼 게 된 것은, 악수를 할 때 그들의 눈에서 느껴진 살기와 허리띠에서 흘긋 보인 표창 때문이었다. 악수를 하고 손을 내리자, 잠바자락에 덮여서 허 리띠는 더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식사를 마칠 때까지도 기분좋은 듯한 미 소 속엔 간간히 날카로운 살기가 섞여들곤 하는 것이었다. 루엔 콜리는 호탕하고 능글맞게 생긴 남자로 별로 큰 키는 아니었지만 체격이 당당해서 위압감을 주었다. 왠지 술을 기차게 잘 마실 것 같은 사 람이었다. 식사중에도 거의 혼자서 떠들다시피 했다. 곁에서 듀렌 테일러 가 한두 마디씩 대꾸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들리는 것은 루엔의 목소리 뿐 이었다. 그에 반해서 스파트 피렌은 말이 별로 없고 생각이 깊어보이는 남자였다. 그리고 헐렁한 잠바를 입었음에도 어딘가 모르게 부티가 나 보 였다. 흘끔흘끔 쥬엘을 곁눈질해 보곤 하는 것이 마치 15세 소년 같은 느 낌을 주었다. 스파트 피렌? 이런! 쥬엘은 저도 모르게 그를 빤히 쳐다보 았다. 황금실 같은 금발, 푸른 눈동자, 화려하면서도 부드러운 이미지, 선이 뚜렷한 잘생긴 얼굴 -- 유토피아의 사촌 오빠 스파트 피렌이었다. 뉴욕에서 안토니오 피렌과 그 딸 유토피아 피렌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 고 정리할 때, 빨간 별딱지를 매겨 놓았던 사람이 둘 있었다. -- 이 두 사람에 관해선 눈여겨 봐 두세요. 스파트 피렌은 유토피아의 사촌 오빠로, 유토피아 다음으로 안토니오와 친근한 관계를 가진 사람이 니까요. -- 스파트 피렌, 27세. 와, 잘생겼는데. 파파보다는 못하지만. 아직 미 혼. 현재 피렌그룹의 프랑스 지사 사장으로 근무중. 영국의 옥스퍼드 대 학 경영학과 졸업. 역시 옥스퍼드대에서 석사학위 받음. 대단한 사람인가 봐. -- 능력있는 사업가지요. 유토피아가 피렌그룹의 회장자리를 물려받지 않게 되면, 십중팔구 스파트가 떠맡게 될 테니까요. -- 그것도 내가 할 일이야? ♥-- 물론이지요. 안토니오 輪j뼁 관한 한 모든 일은 당신 담당입니다. -- 설마 그와 결혼하라고까지는 안하겠지? <결혼하고 음식에 조금씩 독 약을 타서 죽여버린 후 얼마간 피렌그룹의 여회장 노릇을 하다가 파파에 게 팔아버린다> 라는 식으로 말야. --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군요. 하지만 방법이 너무 낡았는데요. -- 농담 말고, 또 한 사람은 누구야? -- 디노 레콘. 57세. 행방불명 된지 4년째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 이 사람이 누군데? 뭔가 죽고 싶다는 표정이로군. -- 안토니오의 현재 부인의 전 남편입니다. 24살 차이가 나는 부부라서 별로 원만하지가 못했는지 부인이 음식에 독을 넣기 시작했지요. 아까 당 신이 말씀하신 그 방법대로 말입니다. 근데 이걸 알아채고 도망갔는지 행 방불명이 되었다더군요. -- 디노 레콘, 스파트 피렌. 알겠어. 기억해 둘께. "내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스파트 피렌이 머쓱해진 얼굴로 물었다. "아, 아니예요... 미안해요." "잘생긴 총각만 바라다 봐 주는 거요? 이거 어디 서러워서 살겠수? 나 도 아직 30대 청춘인데." 루엔 콜리가 이렇게 말을 던져왔을 때 그 눈빛에는 번뜩이는 살기가 스 쳤다. "30대랬댔자 39살이지 뭐. 몇달 안 있으면 40대가 될 테고." 듀렌이 빈정거리듯이 말하고 웃어제끼는 바람에 쥬엘도 얼떨결에 따라 웃긴 했지만,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왜 나에게 살기를 품는 걸까? "아가씬 스무살도 안 돼 보이는군." 루엔 콜리가 다시 물었다. "글쎄요. 스무살 쯤은 됐어요." "아냐. 스무살이 안 됐어. 스무살이 넘었다면 그렇게 몸을 꼭꼭 감싸고 다닐리가 없지. 더구나 이 더운 여름에. 저 아가씨처럼은 입어야지." 루엔이 가리키는 쪽을 보니, 정말 <시원>해 보이는 옷차림을 한 아가씨 가 있었다. 맨발에 샌달을 신었는데, 엄지 발톱의 하늘색 매니큐어가 인 상적으로 느껴지는 아가씨였다. <아름다운 아가씨>라기에 손색이 없었다. 왠지 쥬엘은 가슴속에서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부러워하는 걸까? 내가? "당신도 꽤 좋은 몸매일 것 같은데." 루엔이 쥬엘을 바라보며 능글능글하게 말했다. "글쎄요. 그래도 난 양복이 어울리는 차림새라고 생각해 왔는걸요." "그도 그렇군. 아가씬 양복이 이상하게 어울리거든." "그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 쟝 모렐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남자 같은 차림새를 했을 때 여자다운 사람이 진짜 여자다운 사람이다.'라고." "그렇군. 당신은 양복을 입었어도 남자같은 느낌은 안 드니까. 그렇게 키가 큰데도." 쥬엘은 최대한으로 여자답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쥬엘의 양복은 천이 얇고 부드러운 편이어서 섬세한 여자다움이 풍겨나오도록 맞춘 것들이었 따. 그래서 <검은 양복>과 <짙은 곤색 넥타이>라는 매력없고 딱딱한 복장 에도 불구하고 여자대접을 받아올 수 있었다. 열 세살 때 이후로 줄곧. 그 전에야 파파와만 얼굴을 마주 대했으니까 복장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 고. 그럭저럭 식사가 끝나자, 루엔 콜리가 포카를 제안했다. 그래서 근처의 호텔 라운지로 자리를 옮겼다. 넥타이핀이 여전히 듀렌의 왼손 넷째, 다 섯째 손가락에 감싸여 있었기 땡문에 쥬엘도 어쩔 수 없이 따라갔다. 포 카 -- 그건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쥬엘은 거의 휩쓸다시피 해서 온통 따 버렸다. 사내들도 보통 솜씨는 아니었으나 쥬엘에게는 당해낼 수 없었다. 쥬엘은 라스베가스에서 8개월간 세계적인 도박왕이라는 재커리 제임스에 게서 훈련받았었으니까. 재커리는 정말 즐기기 위해 사는 사람 같았고, 그 즐거움을 느끼는 방법도 쥬엘에게 가르쳐 주었었다. 그에게서 도박을 배우는 동안은 정말 한껏 즐거웠었다. "젠장, 이 루엔 콜리가 이렇게까지 잃어보기는 처음이로군." 루엔이 분통을 터뜨렸다. "술 사드릴께 진정하세요." 쥬엘은 여유있게 웃고는 칵테일을 주문했다. 돈은 풍족해서 아까울 게 없었다. 마시고 포카를 계속하고 또 마시고... 밤을 꼴딱 새워버렸다. 아 침식사 테이블에 둘러 앉자, 그들은 감탄어린 시선으로 쥬엘을 바라보았 다. 심심풀이 게임이었기 때문에 그리 많은 액수가 아니었기에 망정이지, 진짜 도박이었다면 지금 그들은 알거지가 세번 되고도 모자를 만큼을 잃 었을 것이다. 그들의 시선은 차라리 존경에 가까왔다. "어디서 그렇게 포카를 배웠습니까? 솜씨가 놀라운데." 듀렌 테일러가 빵에 버터를 바르며 말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넥타이 핀 은 여전히 그자리에 있었다. "별로요. 운이 좋았을 뿐이예요." "피곤하지는 않아요? 비행기 여행에다가 한잠도 못잤는데." "젊고 건강한걸요. 이틀밤쯤은 꼬박 새워도 문제 없어요." 식사를 마치자, 쥬엘은 듀렌을 구석으로 불러냈다. "내 넥타이핀을 돌려줘요, 이젠." 돌려주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들의 본색을 알아내기 위 한 시도라고나 할까. 듀렌은 자기의 왼손 새끼손가락에 꼭 감싸여 있는 자그마한 은제품을 내려다 보더니, 다시 고개를 들고 씨익 웃으며 말했 다. "그렇게는 안되겠는걸. 이봐, 당신은 이제부터 우리 별장으로 가줘야 겠어."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조용히 하는 게 좋을 껄. 소리없이 사라지고 싶지 않다면 말야. 쥬엘 실버 오스몬드." 졌다. 역시 이 사람은 처음부터 나를 노린 거였어. 파파가 말하던 그 이탈리아 조직이 분명하군. 내 이름을 저렇게 정확하게 알고 있으니까 <올리비아> 따위 가명을 댈 것까지도 없었는데. "저 친구들도 함께 가는 거니까 심심치는 않을껄. 게다가 알프스 산중 에 있어서 경치하나는 그만이니까." 듀렌은 짙은 밤색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승리자의 웃음을 웃었다. 어느 새 루엔 콜리와 스파트 피렌이 등뒤로 다가와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포 로? 인질? 아니면... 복수? 쥬엘은 잠시 머리를 갸웃거렸지만 곧 쾌활하 게 대답했다. "좋아. 가도록 하지, 듀렌." 상대가 무례하게 구는데 이쪽에서 따박따박 존대말 써 줄 필요는 없겠 지. 쥬엘은 듀렌의 커지는 눈동자를 보고 킥킥댔다. 그의 얼굴에선 웃음 기가 사라져 있었다. 쥬엘이 쾌활하고 명랑한 데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 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곧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저렇게 쾌활 할 수가 있을까? 알프스 산중 -- 사실 쥬엘은 그 말에 이끌린 것이었다. 여기서 듀렌의 손아귀를 벗어난다고 해도 어차피 알프스로 가야 파파를 만날 수 있으니 까. 까짓거, 공짜로 알프스까지 택시 타는 셈 치지 뭐. 하지만, 이런 택시라면 정말 공짜라고 해도 타고 싶지 않아. 지극히 <폐차당할 만한> 시퍼런 차. 쥬엘은 폭스바겐에 올라타면서 속으로 투덜 거렸다. "별로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군!" 듀렌이 휘파람을 멈추고 악을 썼다. 악을 쓰지 않으면 뒷좌석에 앉은 두사람의 노래소리에 묻혀 들리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쥬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열어놓은 차창으로 마구 바람이 불어와 쥬엘의 검은 머리는 온통 헝클어져 있었다. 너무 더워. 쥬엘은 속으로 생각했다. 엊저녁 식당에서 본 그 하늘색 매니큐어의 아가씨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다면 좋을텐데. 갑자기 쥬엘의 뺨에 차가운 물건이 와 닿았다. 곁눈질해서 보니 권총이 다. 음... 독일산 24구경. PTY 사의 막스 데거의 솜씨로군. "이쁘지? 내 자랑거리인 권총이란다, 꼬마야." 루엔 콜리가 말했다. 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쁜데. 막스는 권총을 이쁘게 만드는데는 천재적이지." "허, 막스를 알고 있나?" "뭐, 별로. 그냥 조금 아는 정도야." 그가 만들어 준 권총이 지금도 뉴욕의 파파의 집에 그대로 있을 것이었 다. 사격에 대해 최종 테스트를 받으러 독일로 갔을 때 막스 데거는 쥬엘 에게 A+를 주었고, 또한 그 권총까지 만들어 주었다. 그것도 <내 귀여운 친구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보수도 받지 않고. "난 사격에선 둘째가라면 눈에서 피눈물이 나지." 루엔 콜리는 권총을 입김으로 불어가며 닦기 시작했다. 아예 탈출하려 는 생각 자체를 없애버리려는 것 같았다. 어차피 쥬엘은 탈출할 생각 같 은 건 없었다. 지금의 쥬엘에게는 그저 호기심과, <파파에게 돌아갔을 때 무엇인가 보고할 것>을 찾아야 하겠다는 의무감 밖에 없었다. 태양이 거 의 머리 위까지 왔을 때 저 멀리 알프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웅대하고 하 얗게 눈이 부신 그 모습에, 쥬엘은 비로소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자, 내려." 듀렌 테일러가 차문을 열어주었다. 쥬엘은 훌쩍 뛰어내렸다. 쥬엘의 양 복은 온통 땀으로 젖어있었고, 다른 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시퍼런 폭 스바겐 마저도 땀에 절은 듯 누렇게 퇴색해 보였다. 듀렌의 별장은 생각보다 컸다. 아니, 별장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성같은 느낌을 주는 낡은 건물이었다. 오후 3시경의 활활타는 태양 아래에서도 별장 주위엔 왠지 서늘하고 음산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갑자기 등에 총구멍이 와 닿았다. "자, 들어가실까? 미스 쥬엘 실버 오스몬드." 루엔 콜리의 목소리였다. 쥬엘은 방긋 웃고는 말했다. "물론 들어가야지. 이 집에는 냉방장치가 되어 있겠지?" 저녁식사는 스파트 피렌이 가져다 주었다. 쥬엘은 앉아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빵과 오믈렛과 포도주가 담긴 쟁반을 받아들었다. "독을 넣은 것은 아니겠지?" "독? 물론이지. 우리 귀중한 아가씨를 독 같이 시시한 방법으로 죽일 수야 없지." 스파트 피렌은 가만이 쥬엘의 뺨을 어루만졌다. 쥬엘은 고개를 약간 돌 려서 그 손가락을 깨물어버렸다. "이것봐, 스파트. 이왕이면 유토피아의 사촌오빠 답게 행동하라구." 스파트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유토피아를 알고 있나?" "당연하지. 영국에서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으니까." "안토니오에 관해서도 알고 있겠군." "그에 관해서라면 신발 문수까지도 알고 있지. 자, 이제 난 식사를 해 야겠어." 쥬엘은 얌전히 쟁반을 들고 돌아서서 소파로 돌아가 앉았다. "아참, 쥬엘. 듀렌이 이걸 갖다 주라던 걸." 스파트가 무엇인가를 던졌다. 받아보니 넥타이핀이다. "고마와. 이젠 탈출 할수 있겠군." "바보, 여기는 6층이야, 쥬엘." "당신들은 몇층에 있지? 옆방에 있나?" "우린 1층에 있지. TV 카메라로 당신을 감시하면서 말야." 스파트는 기분좋게 웃었다. 열다섯 소년같은 웃음이었다. 그리고는 나 가버렸다. 밖에서 자물쇠 채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쥬엘은 넥타이핀에 입김을 불어댄 후 양복 소매로 쓱쓱 닦았다. 그리고 포도주를 약간 묻혀보았다. 색깔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쥬엘은 혀로 이 작은 은수공예품에 묻은 포도주를 말끔히 핥아낸 후 넥타이에 꽂았다. '나의 나머지 인생을 위하여.' 쥬엘은 잔을 가볍게 위로 쳐들었다가 쭉 들이켰다. "덜 익었어. 담은지 5년도 안 되는 포도주를 손님 대접에 쓰다니." 쥬엘은 투덜거리고는 앞에 놓인 음식을 깨끗이 먹어치웠다. 빈 그릇이 담긴 쟁반을 옆으로 밀쳐놓자, 쥬엘은 뒤로 깊숙히 기대 앉 아 긴 다리를 탁자 위에 얹어 꼬았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방안엔 창문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천정 한가운데에 커다랗고 화려한 샹들리에가 달려있는 것을 비롯하여 곳곳에 갖가지 조명이 있어서 방은 밝았고, 또한 굉장히 사치스러웠다. 책이 빽빽히 꽂혀 있어서 묘하 게 고상하게 보이는 커다란 책장 두 개를 제외하면 온통 번쩍번쩍한 장식 품들 투성이었으니까. 꽤나 큼직한 이방은 보통의 작은 아파트를 원룸 시 스템으로 만들어 놓은 것과 흡사했다. 부엌이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한 구석의 커다란 2인용 침대와 쥬엘이 앉아있는 소파, 거울이 붙어있는 옷 장 등 가구들도 모두 갖추어져 있었고, 포커용 테이블도 있었다. 가구는 모두 화려하기 그지 없는 것들이었고, 그밖에 벽시계, 그림 등 장식품도 마찬가지였다. 이 화려한 방이 알프스 산중에 있는 음산한 낡은 별장안에 있다고 하면 대체 누가 믿어줄까. "자, 이제 어떻게 하죠?" 스파트 피렌이 루엔 콜리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긴. 저 앨 디노에게 데려가야지." "디노라고요? 그 사람이 있는 곳을 알아요?" "대체 자넨 아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군. 그래, 디노가 있는 곳을 안다 네." "안토니오의 지금 부인의 예전 남편 디노 레콘을 얘기하는 거 맞죠?" "그래." 루엔은 짤막하게 대답하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듀렌, 자네도 디노를 아직 못 만나봤지?" "그래, 루엔. 난 줄곧 영국에 있었으니까. 그 빌어먹을 기능공 노릇을 해가면서 말이지." "기능공? 하하. 그래, 천하의 듀렌 테일러가 고작 기능공 노릇을 하면 서 지냈단 말이지? 그것처럼 어울리지 않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로마 교황이 구두닦이로 직업을 바꿨다는 게 차라리 덜 이상하지." "놀리지 마, 루엔. 근데, 저 앨 디노에게 데려간다는 건 무슨 소리야?" "그거야, 디노가 저 애의 숨통을 끊어줄 거라는 말이지. 당연한 거 아 냐?" "디노가 무슨 수로?" "디노는 동물을 키우고 있지. 알프스 산맥에서 말야. 그리고, 동물 발 톱 자국, 이빨 자국이 잔뜩 난 시체를 생산해 내는 거야. 저 애도 예외는 아니지." "그건, ... 너무 잔인한 거 아닌가요? 저 앤 아직 스무살도 안 된 것 같은데." 스파트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긴장해서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잔인? 웃기지 말게, 스파트. 그따위 소리를 하려거든 자네 사무실로 얌전히 돌아가라구. 그리고, 그 서류더미들에나 코를 쳐박고 지내란 말 야! 그들이 우리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 제길, 아무 리 안토니오의 조카라고 해도 저렇게 나약한 녀석은 끼워주는 게 아니었 는데..." 스파트는 한쪽 구석에서 낭패한 듯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호기심, 그리고 안토니오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와지고 싶은 욕심 -- 이 두가지 가 그의 자존심을 완벽하게 무너뜨려 놓은 것이었다. 정말 돌아가서 서류 더미에 파묻혀 일하는 편이 훨씬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안토니오의 회사를 물려받기 위해서는. "이게 왠일이야. 어서 들어와, 마리." 앙트와느 그랑디에는 문을 열고 한걸음 비켜서서 마리가 들어오길 기다 렸다. "별일 없었어요, 앙트와느?" 마리가 챙넓은 하얀 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들쑥날쑥한 짧은 머리가 드 러났다. "아니,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냐? 넌 머리를 지독히도 아꼈잖아. 말은 <저주받을 빨간 머리>라고 하면서도 말야." 앙트와느가 키득거리며 물었다. 마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됐어요. 샤워 좀 할께요." "피에르가 그렇게 자르라고 시키던?" "피에르? 피에르 에드윈 P.아담 말예요? 아아뇨, 그완 아무런 상관없어 요. 상관 있는 건 일에 대한 내 책임감 뿐이라고요. 의 부탁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이건 정말 재미있는 일이거든요. 쥬엘이라는 애, 진 짜 재능있는 애라서 공을 때리는 룰을 피부로 느끼고 있더군요. 괜찮은 애예요, 정말." "호오, 테니스 세계 챔피언을 12년간 지켜낸 르네 후랑소와즈의 딸한테 서 인정을 받다니. 쥬엘은 과연 쥬엘이군. 피에르의 눈이 정확했어. 그런 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지금쯤 한참 바쁠텐데. 대회도 석달밖에 안 남았잖아." "두주일간 휴가예요. 여행을 해야한다나 봐요. 그애가." 앙트와느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핵심 멤버들이 온통 알프스로 모여들고 있으니까." 마리는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앙트와느는 자기방으로 들어가 입고 있 던 편한 차림의 옷을 벗어던지고 검은 양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지금 떠나면 자정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탈 수 있을 것이다. 옷을 다 갈아입고, 넥타이를 매고, 은수공예품으로 된 넥타이핀을 꽂고 나자, 거실로 가서 담배를 피워물고 마리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마리가 나와서 신 사의 맞은 편에 앉았다. 여전히 소매없는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차림이 었다. "어디 가나요, 앙트와느?" 마리가 백을 뒤적여 몇가지 색의 매니큐어를 꺼내면서 물었다. "응, 리용에." "어머, 나도 같이 가요. 어차피 휴가는 프랑스에서 보내려던 참이었으 니까. 그건 그렇고 무슨 색이 좋겠어요? 엄지 발톱에 매니큐어를 새로 칠 해야겠는데. 샌들을 신으니까 너무 빨리 벗겨지는 것 같아요." "분홍." "이거요? 여름 색깔로는 좀 안 어울릴 것 같은데. 이걸 칠할래요, 바이 올렛. 이건 분홍보다는 좀 푸른 기가 있거든요." "좋을 대로 해. 근데 너 혹시 알렉스의 전화번호 알고 있니?" "왜요? 알렉스는 이제 오빠 부하가 아니에요! 또 무슨 일을 하게 하려 고 그래요, 대체?" 마리는 약간 화가 난 듯이 보였다. 신사는 약간 슬퍼보이는 모습으로 싱긋 웃었다. 그는 마리와 알렉스가 함께 도망(?)간 이후로는 줄곧 그들 의 사랑을 거의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번에 유토피아 피 렌의 일과 관련해서 마리에게 쥬엘의 코우치를 맡길 것을 지시받고 그들 을 헤어지도록 했을 때엔 죄책감마저 느꼈었으니까. "난 그가 필요해, 마리. 아니, 우리 전체가 그를 필요로 하고 있어. 그 는 아직 그다지 때가 묻지 않았으니까 이번 일을 해낼 수 있을 지도 몰 라. 뭐, 정 가르쳐 주기 싫으면 관 두라구. 나라고 그깟 전화번호 하나 알아낼 길이 없어서 너에게 묻는 건 아니니까. 다만, 시간이 좀 촉박해 서..." "당신이 할 수는 없나요?" 마리는 엄지발톱에 바이올렛 빛깔을 칠하기 시작했다. "한두 사람의 힘으론 안되는 일이야. 이건 절대적인 위기라구. 어쩌면 우리 측 인원의 반 정도가 소리없이 사라지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야. 피 에르는 예전에 알프스에 가 있고, 쥬엘도 떠났다면서? 쥬엘까지 부른다는 건 사태가 더 악화되었다는 걸 의미하지." "쥬엘? 쥬엘이 그렇게 중요한 존재인가요?" 마리는 탁자 위에 얹었던 오른 발을 내리고 왼발을 올려 매니큐어를 칠 하고 있었다. "우리측 유일의 여자이니까. 20살만 넘으면 <여자>가 필요한 모든 일은 그녀가 하게 될 거야. 지금까지는 너처럼 파트타임으로 필요할 때만 임시 로 일해주던 여자들 뿐이었지만." "쥬엘이 말인가요? 그럼 쥬엘도 의 일원이란 말예요?" "그래. 그것도 너처럼 준회원이 아닌 정회원이지." "쥬엘은 아직 열여덟살이예요. 그런 청소년기의 아이가 의 일때 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알프스로 갔다는 거예요?" "맞아. 바로 그렇다구." "다 칠했어요. 봐요, 예쁘죠?" 마리는 양무릎을 구부려 탁자위에 양발을 얹었다. 양쪽 엄지 발톱이 바 이올렛 빛깔로 곱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 이쁘다." 마리는 잠시 그 상태로 깍지낀 손으로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무릎위 에 얹은 채,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러다가 불쑥 말했다. "알렉스의 전화번호는 62-4578-611 이예요." 새 날이 밝았다. 쥬엘은 멋들어진 벽시계를 보고 그걸 알았다. 간밤에 는 한구석의 커다란 침대에서 양복에 넥타이까지 맨채로 잠을 잤었다. 구 김이 잘 안가도록 합성수지로 처리한 양복 덕분에 아직도 쥬엘의 모습은 단정해 보였다. 창문이 없는 이 방안에서는 이미 오전 10시가 가까운 시간인데도 전등 이 세 개나 켜져 있었다. 천정 한가운데의 커다란 샹들리에만 해도 충분 할 텐데 형광등도 두개나 켜져 있는 것이다. 쥬엘은 오전 6시경에 일어나 서 책장을 훑어보다가 그 중에서 <로마의 전성시대>라는 책을 꺼내어 읽 던 중이었다.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은 주로 역사와 철학에 관한 것들이었 고, 대부분이 손때가 잔뜩 묻어있었다. 누구의 책인지는 몰라도 아마 이 책들의 주인은 굉장한 사상가일 것이었다. <로마의 전성시대>는 스위스의 어느 역사학자가 쓴 책이었는데 어려운 용어도 별로 없으면서 내용을 인상깊게 서술하고 있었다. 쥬엘은 로마가 굉장히 멋지고 웅대한 나라였다는 걸 충분히 인식했다. 아니, 웅대하다느 니 멋있다느니 하는 말만 가지고서는 뭔가가 부족했다. 뭔가 찡하는 느낌 이 있었으니까. 불타버린 로마를 서술한 대목에서는 한동안 페이지를 넘 기지 못한 채 감명에 젖어있을 정도였다. 책에 한창 열중해 있을 무렵 자 물쇠를 덜거덕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듀렌 테일러, 루엔 콜리, 스파트 피렌이 등산복 차림을 하고 차례로 들어왔다. "굳모닝? 잘잤어? 배가 슬슬 고픈데 아침식사는 안 줄건가?" 쥬엘이 명랑하게 외쳤다. 그리고 아쉬운 듯이 읽던 책을 내려놓았다. "아침식사는 산에 올라가서 하기로 하지, 쥬엘. 오늘은 등산을 할 계획 이니까." 듀렌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 미소는 좀 피로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자, 일어나시지. 조금이라도 오래 살고 싶다면 말야." 루엔 콜리가 오른손이 순간적으로 표창을 꺼내들었다가 집어넣었다. 재 빠른 손놀림이었다. "표창도 잘 던지나? 권총만 자랑하더니만. 어쨌든 좋아, 나도 등산은 좋아하니까. 하지만 그런 거 갖고 장난하진 말아 줘. 나 화나게 될지도 모르니까." 쥬엘은 무표정하게 어제 저녁 식사했던 쟁반에서 샐러드용 작은 포크를 집어서 휙 던졌다. 포크는 루엔 콜리가 슬쩍 기대고 있던 책장 모서리에 날아가서 정확하게 꽂혔다. 커다란 마호가니 책장은 끄덕도 하지 않고 직 각으로 꽂힌 포크를 내려다보듯 서 있을 뿐이었다. 루엔 콜리가 어줍잖은 웃음을 웃었다. "그러는게 좋겠군, 쥬엘." "그럼, 가지 뭐. 달리 할 일도 없으니까. 슬슬 태양도 그리워지기 시작 했고." 쥬엘은 내뱉듯이 말하고 성큼성큼 문을 빠져나갔다. 세 사람도 곧 뒤를 따랐다. 그들의 표정은 과히 밝지 못했다. 두려워하고 있진 않았지만 긴 장하고 있었다. 별장 앞에서 낡은 폭스바겐에 올라탈 때 쥬엘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 았다. 그리고, 폭스바겐의 앞바퀴 한가운데에 작은 은색 네잎 클로우버 모양의 스티카가 붙어있는 것을 보고 만족해서 씨익 웃었다. 메세지는 파 파에게 무사히 전달되었고, 누군가가 휴대용 탐지기를 이용해서 여기까지 는 무사히 미행해 온 것이다. 이제 앞으로의 목숨은 미지수였다. 어쩌면 두세시간 후엔 죽어있게 될 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쥬엘에게는 도망가겠다는 생각 같은 것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목숨이 위태 로운 순간이 실제로 다가오리라고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었으니까. 쥬엘은 넥타이핀을 다시 한번 만져보았다. 전파는 계속 발신되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 쥬엘은 눈앞에 놓은 눈부신 산맥을 쳐다보았다. 저 두터운 산 맥을 이 자그마한 수공예품에서 보내는 전파가 통과해낼 수 있을까? 부르릉 --. 차가 온 몸을 떨었다. 듀렌은 악셀레타를 밟아 시퍼런 폭스 바겐을 산맥쪽으로 달리게 했다. PART 6. "쥬엘은 어디 있어요?" 마리 그랑디에가 물었다. 어젯밤 자정 비행기로 앙트와느 그랑디에와 함께 프랑스로 날아와 리용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지금은 알프스 산맥의 자그마한 산장에서 피에르 애드윈 P.아담과 만나고 있는 것이다. "놈들에게 붙잡혔지." 파파는 시들하게 말했다. 건조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구해올 수는 있겠지?" 앙트와느가 다급하게 물었다. 파파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 알프스 산맥이 쥬엘의 발신을 막아버렸어." "그럼... 이것으로 열 네 사람째인가?" 앙트와느가 조심스레 묻자 파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는 도 통 모르겠다는 듯이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제길, 그놈들은 정말!" 앙트와느가 신경질을 내며 회의와 절망이 섞인 감탄사들을 마구 뱉어냈 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단서가 될만한건?" "그들이 별장으로 쓴다는 낡은 건물이 있는데, 열 세명, 아니 쥬엘까지 열 네명이 모두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었어. 그리고는 알프스 산맥 깊숙히 로 끌려들어갔지. 지금 쥬엘에겐 발빠른 녀석 하나를 미행시켜두긴 했지 만... 글쎄, 성공하긴 힘들거야. 놈들은 워낙 눈치가 빠르니까." "별장에 관해 달리 아는 것은 없나?" "위치는 여기서 북동쪽으로 40km지점. 420년쯤 전에 라펠이라는 프랑스 남작이 세운 성이었던 모양인데, 지금의 소유주는 안토니오 피렌으로 되 어있어." "안토니오 피렌?" 앙트와느가 큰소리로 되물었다. "그래, 안토니오 피렌. 결국 <밀라노-엘바>는 안토니오와 관련이 되어 있다는 얘기지." "그래... 그렇군. 이제야 알겠어. <밀라노-엘바> 조직이 자금확보에 신 경을 통 안쓰던 이유를 말야. 안토니오처럼 든든한 배경이 있으니까 돈 걱정따윈 필요도 없었겠지. 물론 안토니오를 돕기도 많이 했겠지만. 결국 상부상조란 얘긴가." "그렇지만도 않아. 안토니오는 단순한 관련자가 아닌 것 같아. 오히려 <밀라노-엘바> 단원 전체가 안토니오의 지시대로 행동하는 것 같은 생각 도 들거든." "그렇게까지? 믿을 수가 없는데. 안토니오는 피렌 그룹의 회장이야. 일 때문에 죽을 지경으로 바쁜 사람이라구. 어떻게 그렇게 사사로운 일까지 신경쓸 수가 있겠어?" "사사로운 일인지 아닌지 알 게 뭐야!" 파파는 약간 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담배를 집어들어 불을 붙였다. "쥬엘은 별장에서 어느쪽으로 끌려갔지?" "산맥 중심쪽이라는 건 확실해." 그들은 둘 다 완전히 맥이 풀린 것 같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 허탈감만 을 느끼고 있었다. "쥬엘을 부르는 게 아니었어, 피에르."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난 지금 쥬엘의 능력을 믿어. 그앤 강하게 키 워졌으니까. 앙트와느, 자넨 상상도 못할거야. 여자애를 그 정도까지 강 하게 만든다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내가 그렇게 혹사당했다면, 그런 지옥같은 훈련속에서라면, 난 일곱번은 자살했을 거야. 그러나 그애는 안 그랬어. 그앤 정말 강하다구. 그애 같으면 살아나올 수 있을 지도 몰라." "글쎄. 그래봤자 이제 겨우 열여덟살짜리 여자애인걸." "그래. 열여덟살이지. 하지만 걱정되는 것은 나이가 아니라 경험이야. 그앤 실제로 의 활동을 해 본 일이 없으니까. 유토피아의 일이 그 애에겐 최초의 작업이거든. 좀 더 경험을 쌓게 할껄 그랬어. 죽어라고 훈 련만 시키지 말고." 파파는 담배를 한모금 더 빨아들이더니 한숨과 함께 내뿜었다. 그리고 는 중얼거렸다. "그래, 열여덟살짜리 여자애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보통의 여자애는 아 니니까." 더이상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각기 곰곰 생각에 잠겨 있을 뿐. 한참동안 침묵이 계속되자 마리는 가슴이 답답해 오는 것을 견디지 못하 고 무엇인가 말을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가만이 앙트와느에게 말했다. "지금쯤 알렉스가 있을 거예요, 앙트와느. 벌써 오후 세 시가 넘었으니 까." "아, 그렇군. 전화는 어딨지, 피에르?" "네 뒤쪽에." 앙트와느는 고개를 돌려 전화를 보자, 곧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전화벨이 울리자 크리스토퍼 프린스는 시계를 흘깃 보고 수화기를 들었 다. 벌써 저녁식사 시간이 가까와 오고 있었다. "여보세요." "알렉스냐?" "앙트와느! 앙트와느 맞아요? 대체..." "기억해 주니 고맙군. 벌써 3년이나 지났는데." "앙트와느 맞군요! 대체 왠일이예요, 이렇게 갑자기!" "그렇게 소리지르지 않아도 잘 들린다, 알렉스." 앙트와느의 목소리는 아주 정답게 들렸다. 크리스토퍼가 마리와 달아나 버렸었다는 것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다. 크리스토퍼는 앙트와느 의 목소리에 괜히 눈물이 나려고 했다. "엊저녁에도 걸었고 오늘 아침에도 걸었었는데 계속 집에 없던데." "아, 학교 코우트 안에서 잤어요. 난 지금 런던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테니스 코우치 노릇을 하고 있거든요." "바쁘냐?" "별로. 오늘부터 학기말 고사가 시작돼서 난 완전히 휴가나 마찬가지예 요. 부원들이 모두 시험공부 중이니까요. 근데 대체 무슨일로..." "네 도움이 필요하다, 알렉스. 지금 곧 프랑스로 날아와." "프랑스요?" "응, 프랑스의 알프스 산맥으로 와 줘. 리용 공항으로 마리를 내보낼테 니까 오늘 밤 10시 비행기를 타. 리용행 <에어 프랑스>기를 예약해 놓을 테니까." "알겠어요, 앙트와느." "아참, 난 명령한게 아니라 부탁한 거다. 알겠지?" 미처 되묻기도 전에 전화는 끊겨버렸다. 크리스토퍼는 한동안 수화기를 든 채로 있었다. 앙트와느의 목소리의 여운이 정겨웠다. 수화기를 제자리에 놓으면서 크리스토퍼는 '프랑스의 알프스...'하고 중얼거렸다. 그의 머리속에 쥬엘이 언듯 떠올랐다. 그는 망설임없이 일어 나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리가 마중나온다는 건 무슨 소리지? 5개월 동안은 아무일도 못하고 붙들려 있어야 한다더니...' "당신답군요, 앙트와느. '아 참, 난 명령한게 아니라 부탁한 거다.'라 구요? 그건 나 들으라고 한 소리죠?" "그는 이제 내 부하가 아니니까 명령하면 안된다면서?" "몰라요. 결국은 명령한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런데 신경쓰지 말고 가서 좀 자 둬. 이따가 리용까지 마중가려면 피 곤할테니까." 쥬엘 오스몬드, 듀렌 테일러, 스파트 피렌, 루엔 콜리는 알프스 산맥 깊숙히를 걷고 있었다. 별장에서부터 두시간쯤 자동차를 탄 후에 벌써 8 시간 가까이 걷고 있는 것이었다. 사내들 셋은 등산복 차림에 배낭을 하 나씩 짊어진 상태였고, 쥬엘은 아무것도 들거나 짊어지거나 하지 않은 상 태로 검은 양복을 입은 채였다. 쥬엘의 양복은 군데군데 찢겨나갔고, 오른쪽 내째 손가락은 부러졌으 며, 머리카락도 완전히 헝클어져서 귀신 꼴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크게 찢겨져 나간 왼쪽 팔뚝에는 피가 스며나온 얼룩이 있는 하얀 손수건 -- 스파트 피렌의 손수건이 매어져 있었다. 쥬엘은 몹시 지쳐 있었지만 표정 엔 아무런 변화도 없이 콧노래로 '케세라 세라'를 흥얼 대었다. 사내들은 그러한 쥬엘을 얄밉다는 듯이 바라보곤 했다. 특히 스파트 피렌은 쥬엘이 얄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가 미끄러지거나 넘어지거나 할 땡마다 쥬엘 이 돌아보며 '배낭 이리 줘, 좀 들어주지.'라고 놀려대는 것에 잔뜩 약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젓긴 했지만 사실 은 배낭 따위 아무에게든 떠맡겨 버리고 홀가분해졌으면 하는 생각이 굴 뚝 같았다. 별장을 떠나기 전, 루엔 콜리가 짐을 네개의 배낭에 나눠 담아 놓았을 때에, 그런 몹쓸 제안 -- 쥬엘은 옷차림도 불편하고 아직 어리니까 쥬엘 몫의 배낭에 담겨 있던 물건들은 사내들의 배낭에 나눠 담아 버리자는 -- 을 한 것은 원래 스파트 자신이었다. 루엔 콜리는 잔뜩 투덜거렸지만, 듀 렌이 스파트에게 동의하자 '좋을 대로 해. 배낭을 메고 가는 것은 자네들 이니까.'라고 양보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스파트 피렌은 지구 를 등에 짊어진 듯한 고통속에서, 그러한 제안을 했던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원래 스파트도 약골이라고 할 수는 없는 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산중에서, 게다가 루엔이나 듀렌같은 사람들과 함께 있다보니, 자기 자신이 너무도 약하게 느껴지는 데 대한 혐오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 었다. 쥬엘은 '케세라 세라'를 흥얼거리면서 이제 곧 목적지에 도착하리라 생 각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산중에서 두 번의 식사를 했고, 사내들의 배 낭 안에는 먹을 것이라고는 빵 한조각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래도 배낭 안에는 아직 짐이 많았다. 무슨 기계부속품 같기도 하고 금속 판 같기도 한 갖가지 쇳덩어리 들이 배낭마다 3분의 2쯤씩 담겨 있었다. 해는 넘어가 버린지 오래였다 .네 사람은 어스름한 달빛과 회중전등에 의지하여 험한 산중을 걸었다. 밤 9시가 가까와 오는 시간의 알프스를 이 렇게 걷는다는 것은 확실히 제정신으로는 못할 짓이었다. 스파트 피렌이 미끄러져 굴렀다가 다시 올라왔다. 그는 마치 등산을 처음 해 보는 사람 처럼 계속해서 구르고 넘어지고 다치고 하였다. 두툼한 등산복을 입지 않 았으면 지금껏 살아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루엔 콜리가 자못 한심하다는 덧이 '자네 시력이 얼만가? 아니면 발가락 소아마비에라도 걸렸나?'라고 물을 정도였으니까. 루엔은 평지를 걷듯이 가볍게 걸었다. 쥬엘은 한기를 느꼈다. 찢겨져 나간 양복 틈새기로 시린 바람이 파고 들어와서 다리며 팔을 저리게 했다. '다행이야, 정말. 하늘색 메니큐어에 샌달을 신고 <시원>한 옷차림을 하지 않은 게. 역시 파파는 선견지명이 있다니까.' 쥬엘은 흥얼거리면서 생각했다. 갑자기 앞장 서 가던 루엔 콜리가 멈춰섰다. 그리고 나직이 휘파람으로 묘한 가락을 불며 벼랑쪽으로 다가갔다. 60도 정도 경사가 진, 그리 심하 게 가파르지는 않은 벼랑이었다. 벼랑 아래쪽에서 탁한 휘파람 소리가 대 답해 왔따. 이윽고 루엔 콜리가 손짓을 하고는 회중 전등을 비추며 아래 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쥬엘이 뒤따랐고, 듀렌과 스파트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벼랑 중간에 머리를 구부리면 가까스로 빠져나갈만한 동굴 입구가 있었 다. 루엔 콜리는 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쥬엘이 잠시 망설이자 뒤따라 내려오던 듀렌이 발로 쥬엘의 어깨를 툭 건드려서 어서 들어가라고 재촉 했다. 쥬엘이 머리를 숙이고 들어서자마자 루엔 콜리가 권총을 거꾸로 잡 고 쥬엘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쥬엘은 그대로 엎어져서 기절해 버렸다. 루엔은 듀렌가 스파트가 들어오고 나자 씨익 웃어 보이더니 권총을 집어 넣으며 여유있게 말했다. "이게 <자동수송>이라는 거지. 미리 기절시키거나 눈을 가리게 하고서 는 도저히 여기까지 데려올 수가 없거든. 제 발로 걸어오게 해도 쩔쩔 매 는 게 대부분이니까 말야. 이녀석은 예외지만." 루엔은 쓰러져 있는 쥬엘을 흘깃 쳐다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아무리 오는 도중에 지리를 잘 외워둔다고 해도 자기 골치만 아 플 뿐이지. 일단 여기까지 들어온 이상 살아 돌아간다는 건 거의 불가능 하니까." "<거의>라구? 왜 <절대 불가능>이 아니지?" 듀렌이 물었다. 루엔의 고른 숨결에 비해 그의 숨소리는 듣기 거북할 정도로 거칠어져 있었다. "글쎄. 꼭 한명이긴 하지만 살아 돌아간 사람이 있었으니까 <절대>라고 는 말할 수 없겠지. 그 녀석은 운이 좋았어. 디노에게 잘 보였거든." "내가 뭘 어쨌다고?" 동굴 안쪽에서 잔뜩 쉰, 쇠를 긁는 것 같은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동굴 안쪽은 완전히 깜깜해서 말하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 다. 루엔이 서서히 그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멋적은 웃음을 지으며 말 했다. "아, 거기 계셨어요? 여기 또 하나 데려왔어요." 루엔이 엎어져 있는 쥬엘을 발로 차서 천청을 보게 했다. 옅은 회중 전 등 불빛 속에서 쥬엘은 세상 모른 채 기절해 있었다. "그래, 자는 애 말고 다른 둘은 누군가? 듀렌 테일러와 스파트 피렌인 가?" 듀렌과 스파트는 깜짝 놀랐다. 디노가 탁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렇게 놀라지들 말게. 난 그저 짐작을 했을 뿐이니까." "잠깐만!" 갑자기 루엔 콜리가 손을 쳐들었다. 그리고 바깥쪽에 귀를 기울이더니 거칠게 내뱉으며 배낭을 내려놨다. "미행이 있었군! 이녀석 계속 뭔가를 흥얼거리더니, 자기네 친구를 끌 어들였어." 그리고는 동굴 밖으로 나가버렸다. 듀렌과 스파트는 그대로 선 채 무슨 일을 해야 할 지를 몰랐다. 그러다가 듀렌이 들고 있던 회중전등을 가만 히 안쪽으로 돌려봤다. 그리 큰 키라고는 할 수 없는 비쩍마른 몸집이 어 렴풋이 보였다. 디노는 웃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모를 묘한 말투로 말하 기 시작했다. "왜?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렇게 궁금한가? 어쨌든 반갑네,듀렌. 자 네는 그동안 영국에 있었다지? 그리스던가, 동생이름이?" "네." 듀렌은 얼결에 대답했다. 듀렌은 어리둥절했다. 자신은 디노에 대해 아 는 게 하나도 없는데 디노는 뭐든지 알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 배낭이나 내려 놓게. 스파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군." 그제서야 그들은 자신들이 아직도 배낭을 메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 다. 너무 지쳐서 머리가 멍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짐을 내려놓고 나자 스파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다시 일어서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그냥 앉아있게, 스파트. 자네로선 여기까지 온 것도 기적적인 일일테 니까." 디노가 탁하게 흐흐하고 웃었다. 스파트는 약이 바짝 올라서 일어서려 다시 애써 보았지만 일어설 수가 없었다. 아니, 일어서기 보다는 차라리 누워버리고 싶었다. "그리스는 이제 3학년인가, 듀렌?" "네. 런던에서 앨런 사모아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테니스부가 유 명한 학교지요. 테니스부 장학생이예요. 그녀석은 나같지 않아, 참 착하 고 착실하거든요." "앨런 사모아 고등학교?" 디노가 커다란 소리로 물었다. 듀렌은 주춤했다. 자기가 뭔가 잘못 말 하지 않았나 생각되었다. 옆에서 스파트가 끼어들었다. "그건 유토피아가 다니는 학교인데..." "듀렌 테일러! 자넨 당장 목을 부러뜨려도 시원치 않을 놈이군. 그리스 를 유토피아와 같은 학교에 다니게 하다니! 그리고 그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단 말야. 대체 정신이 있는 건가? 그리스가 어떤 녀석인지를 몰라서 그 러나?" 디노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다. 그 소리는 동굴벽에 부딪쳐 메아리 를 남기고 돌아다녔다. 귀가 멍해지는 소리였다. "그리스는..." 착한 녀석이예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디노는 듀렌이 말을 마 칠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그애는 선천적인 악마야. 세상에 악당은 많지만 그 애처럼 타고난 악 당은 처음봤어. 벌써 3년이나 같은 학교에 다니게 놔두었으니 그동안 유 토피아를 가만 내버려 뒀을리가 없어! 대체 이 일을 어쩌면 좋지? 듀렌, 자넨 정말 어찌할 수 없는 바보로군. 자기 동생의 일조차도 그렇게 모르 면서 어떻게 그동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 듀렌 테일러의 이름이 아 깝군!" 듀렌은 교무실에 불려가 야단맞는 학생처럼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 다. 그는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보기엔 그리스는 더할 나위없이 순진하고 착한 녀석이었으니까. 이제 열 아홉살이었지만 듀렌이 보기엔 아직도 철없는 어린 아이처럼만 보였던 것이다. 그애가 무 슨 꿍꿍이가 있다니 -- 듀렌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탈리아 악당 의 대명사 듀렌 테일러로서 오직 하나 인간답게 대해왔던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리스 뿐이었다. "이봐, 듀렌. 자네도 그리스도 모두 같은 부모의 피를 받고 태어났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애가 착할 수는 없지 않은가?" 디노의 목소리는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같은 부모의 피... 천재적인 사기꾼 앨버트 테일러와 신시아 리코넬리 의 아들들. 듀렌 테일러도 사실 그의 부모에 비하면 발뒤꿈치에도 못따라 간다. 결국 아들들에게 미칠 화를 막기 위하여 자동차 사고를 가장하여 죽음의 길로 향한 사람들. 그들에겐 죽음마저도 사기극이었다. "이번에 영국에 돌아가면 곧 전학시킬께요." "필요없어. 지난 3년이면 충분히 일을 벌이고도 남았을 거야. 그래, 시 간은 충분했어. 차라리 유토피아 곁에 경호원을 두는 쪽이 낫겠군. 괜찮 은 녀석을 하나 그쪽 학교로 전학시켜서 보호하게 해야겠어. 그리스의 접 근을 철저하게 막기만 하면 유토피아도 어쩔 수 없겠지. 이마 그리스에게 폭 빠져 있겠지만 어떻게든 막을 수는 있을 거야." "제길! 지독한 녀석이군! 그렇게 당하고도 도망가다니!" 갑자기 루엔 콜리가 동굴안으로 머리를 들이밀며 말했다. 흥분해서인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놓쳤나?" 듀렌이 물었다. 루엔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이 빠른 녀석이었어. 녀석의 속도를 계산해서 표창을 던졌는데 계속 스치기만 했거든. 쥐새끼 같더군." 루엔은 약이 오른지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디노가 그런 루엔에게로 서 서히 다가왔다. 깡마른 얼굴과 움푹 들어간 눈이 회중전등 불빛에 드러났 다. "아, 걱정하진 말아요, 디노. 다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멀리 갈 순 없을 거예요." 디노는 아무 대답없이 고개만 한번 끄덕인 다음, 쓰러져 있는 쥬엘의 곁에 앉았다. "이애는 누군가? 굉장히 어려보이는데. 명단에 있는 애가 확실한가?" "물론이예요, 디노. 쥬엘 실버 오스몬드 인걸요." "쥬엘? 이애가 쥬엘이라구? 피에르가 키우겠다고 난리를 피우던 그 쥬 엘 말인가?" "그래요, 디노. 밑천이 많이 든 아이지요." "흐음. 그런 것치곤 너무 예쁘장하군. 난 꽤나 우락부락할 줄 알았는 데, 아주 귀엽게 생겼는걸. 이런 상황에서 미소를 띠고 자다니 배짱이 쓸 만하군." 쥬엘의 얼굴은 가볍게 미소를 띤 얼굴이었다. 뭔가 아주 기분좋은 꿈을 꾸고 있는 듯이. "스파트를 깨우게. 몇가지 물어봐야겠어." 스파트 피렌은 어느새 배낭에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그 얼굴은 뭔가 피로하고 조급해 보였다. 루엔이 그를 흔들어 깨웠다. "스파트, 안토니오는 잘 있나?" "... 네." 스파트는 고개를 흔들어 가까스로 졸음을 털어버리고는 대답했다. "자네가 여기 온 것은 안토니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잘 못 택했어. 자넨 아무리 해도 조카밖에 안 되거든. 친딸만큼 가까울 수는 없지." "하지만 유토피아는 여자잖아요." "안토니오 피렌의 사위 자리를 노리는 사람은 부지기수야. 기꺼이 자기 성을 버리고 피렌이라는 성을 갖더라도 말일세." "안토니오는 아무에게나 회사를 물려줄 사람이 아니예요!" 스파트가 눈이 동그래져서 외치자, 디노가 씨익 웃으며 스파트의 어깨 를 두드렸다. "이제야 잠이 깬 모양이군. 악의는 없으니 용서하게. 자, 그럼 한 가지 만 묻겠네. 대답해 주겠나?" 스파트가 완전히 잠이 달아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중히 생각해서 대답해 주길 바라네. 질문은 이거일세. 만일 안토니 오가 죽었을 때 후계자로 유토피아가 지명되었다면 자넨 유토피아를 감옥 에 보내버릴 수 있겠나? 물론 혐의는 우리가 마련해 줄걸세. 증인과 증거 까지 완벽하게. 자네는 그저 고소하기만 하면 되네. 자네이름으로 고소하 기만하면 유토피아는 일생을 감옥에서 썩게 되고 피렌 그룹은 자네것이 되지." 디노의 목소리를 껄끄러웠다. 스파트는 얼굴이 굳어서 침을 꿀꺽 삼켰 다. 피렌 그룹의 회장... 확실히 욕심나는 자리이기는 하다. 또한 그걸 훌륭하게 이끌어 나갈 자신도 있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안된다. 그애는 너무 착하다. 저 일의 악마같은 안토니오와는 달리 그 애는 감수성이 예 민하고 티하나 없이 맑은 아이다. 스파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 고 느리게 대답했다. "할 수 없어요." 스파트의 표정은 진지했다. 순수하고 맑은, 편안한 얼굴이었다. "좋았어, 스파트! 이젠 됐어. 그렇죠, 디노?" 루엔 콜리가 환하게 외쳤다. 디노도 앙상한 얼굴에 흐뭇한 기운을 담고 대답했다. "그래, 이젠 됐어, 스파트. 자네가 예쓰라고 대답했으면 자네를 우리 귀여운 애완동물의 먹이로 만들려고 했었네. 우린 모두 유토피아를 무지 하게 좋아하는 사람들이거든. 유토피아를 위해서는 자네나 안토니오 따위 는 당장에라도 지옥으로 보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말야. 이 이후에라도 행여나 유토피아에게 손 댈 생각은 하지 말게. 우리가 가만있지 않을테니 까." 디노는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동굴 안쪽의 어두운 곳으로 들어갔다. 동 굴은 꽤 긴 듯 디노의 발자국 소리는 느리게 한참동안 계속되었다. 이윽 고 디노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메아리쳐 들려왔다. "그 아가씨를 이쪽으로 데려오게." 크리스토퍼 프린스는 리용 공항에 도착하여 두리번 거렸다. 이윽고 저 쪽에서 다가오는 빨간 머리의 여자가 눈에 띄자 크리스토퍼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머리를 잘랐구나... "잘 있었어요, 크리스?" "안녕? 그 머리는 대체 뭐야? <왕자와 거지>에 주역으로 발탁되기라도 했나?" "그냥 그래요. 뭐 어때요? 나만 시원하고 편하면 됐지." 크리스토퍼가 마리의 들쑥날쑥한 앞머리를 둘째 손가락에 감았다가 손 가락 두 개로 가만이 잡아당겼다. 여전히 부드럽고 매끄러운 머리칼이었 다. 마리는 눈을 치뜨더니 그의 손목을 잡아 떼어놓고는 머리를 흔들어서 앞머리를 옆으로 넘기며 말했다. "어서가요, 이렇게 멍청하게 서 있을 시간이 없어요."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지? 말해줄 수 없나?" "차에서 말할께요." 그들은 공항 건물을 빠져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크리스토퍼는 앞서 가는 마리의 목이 무척 희다고 생각했다. 여름 햇빛에 드러난 그 목은 맑 고 투명해 보였다. 주차장에는 빨간 색의 2인승 스포츠카가 기다리고 있 었다. 마리가 운전석에 올라탔고 크리스토퍼는 그 옆자리에 앉았다. 차가 서서히 알프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크리스토퍼는 운전하는 마리의 옆모습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머리가 짧 아서인지 더 어려보였고 더 싱싱해 보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그늘진 인상을 주었고 지난 번에 보았을 때보다 더 마른 것 같았다.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크리스?" "나야 맘편하게 지내고 있지. 먹고 자고 운동하고 데이트하고 가끔씩 책도 읽고." "데이트 상대가 생겼군요. 누구? 그 금테안경?" "그래. 율리아 로렌스라고 하지. 우리학교 수학교사야." "수학교사? 재미없어라. 하지만 이름은 예쁘군요." 마리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신경질적으로 악세레타를 밟았다. 크리스토 퍼는 싱긋 웃었다. 묘하게도 마리와 이렇게 같은 차 안에 있다는 사실만 으로도 마음이 훈훈해져 왔다. 전에는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기분이었 다. 이전에 빚을 갚는다는 기분으로 만날 때에는 늘 마리를 기분나쁘지 않게 하려고 신경썼고 그러면서도 마리가 얄밉게 느껴졌었는데, 지금은 그저 따뜻하고 정답다는 느낌만이 가슴에 가득했다. 그래, 율리아 로렌스와 함께 있는 거라면 이런 기분은 <결코> 느끼지 못할 거야. 크리스토퍼는 노래라도 흥얼거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번에 당신까지 부르게 된 것은 너무 궁지에 몰렸기 때문이예요." 시내 중심부를 벗어나 한적한 길에 접어들자 마리가 불쑥 말했다. "앙트와느는 지금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있거든요. 어떻게 손쓸 도리도 없고." "대체 무슨 일인데?" "<밀라노-엘바>라고 들어본 일 있어요?" "응, 조금. 전에 앙트와느 밑에 있었을 때 두세번 상대하기도 했었지. 이탈리아 조직 말이지?" "그래요. 우리랑은 오랜 숙적이지요." "우리? 그 안엔 나도 포함되나?" "물론이예요. 앙트와느와 그렇게 오래 함께 지낸 사람치고 관련이 없는 사람은 없어요. 혹시 라고 들어본 일 있어요?" "PAPA? <아빠> 말하는 거야?" "전혀 아니예요." 마리는 한숨을 폭 쉬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말했다. "정말 모르는 모양이로군요. 는 우리 조직의 이름이예요. <밀라 노-엘바>와는 40년 가까이 대적하고 있는." 크리스토퍼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담배를 꺼내 물 었을 뿐이었다. 마리는 그러한 크리스토퍼를 흘깃 쳐다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어쨌건 는 <밀라노-엘바>와는 대적할 수 밖에 없어요. 원래부터 <밀라노-엘바>에 대적하기 위해서 생겨난 조직인걸요." "그런데 나도 그 라는 조직과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으세요?" "물론이지.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당연히 자세한 내막을 알려줘야 하는 것 아니겠어? 사정을 모르고서야 실력이 있어도 발휘를 못한다는 건 누구 나 다 아는 세상의 진리니까." "후후, 당신은 내막을 모르면서도 그동안 그토록 앙트와느의 일을 잘 도와왔잖아요?" "하긴..." 크리스토퍼의 머리속에 앙트와느의 <내가 하도록 규정지어진 일>이 떠 오르고 있었다. 라. 왜 그런 이름을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을까? 그토록 철저하게 비밀로 할만큼 중요한 일이었나? "뭐, 꼭 비밀이라면 이야기 안해도 상관없어." "이야기 하겠어요. 어차피 가는 동안에 시간이 있으니까. 앙트와느가 알면 펄펄 뛰겠지만, 상관없어요." 마리는 잠깐 크리스토퍼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살짝 미소지었다. 크리 스토퍼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마리가 사랑스러워 견딜수가 없 을 지경이었다. 차속도를 늦추고 샌들을 벗어 옆에 둔 마리가 맨발로 악 셀레타를 밟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 지금으로부터 40여년전, 이탈리아를 온통 장악하고 있던 사기조직 <밀 라노-엘바>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까지 손에 넣으려고 계획하고 있던 중이 었다. 그 때, 미국에서 꽤나 날렸었다는 로코라는 사기꾼이 이 조직에 가 입하려고 했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랐고 미국에서 명성을 얻어 활동해 오다가 부모의 유언에 따라 부모의 나라인 이탈리아에 온 것 이었다. 거의 미국인인 그가 이탈리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밀라노-엘 바> 같은 든든한 세력기반이 필요했다. 로코는 작달막한 키에 호리호리한 몸집이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 았고 얼굴 생김이나 행동도 불량해서 저절로 상이 찌푸려지게 하는 사람 이었다. 늘 청바지 차림에 청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껌을 딱딱 씹어대는 그를 이탈리아 사람들은 <못되먹은 미국인>이라고 수근거렸다. 하지만 그 는 머리가 잘 돌았고, 특히 사람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귀신같은 솜씨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기가 막힌 정보망까지도 갖고 있어서 함부로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밀라노-엘바>의 단원들 중에서도 우연히 그와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이 몇몇 있었는데, 모두들 그를 <두려운> 존재로 여 겼다. 그 당시 <밀라노-엘바>의 단장은 루시오라는 60세 된 거물이었다. 12살 때부터 <밀라노-엘바>에서 활동해 온 루시오는 이제 겨우 서른 살 된 로코가 생각하는 것쯤은 손바닥을 들여다 보듯 환히 알고 있었다. 그 는 로코를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기분좋은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 하고 있었다. 직접 만난 적은 없었어도 면밀한 정보망을 통해 로코와 루 시오는 서로를 <아주 잘> 알았다. 어느 날 저녁, 루시오가 자기 집 -- 밀라노 호텔 12충 12호 -- 에서 저 녁식사를 막 끝마쳤을 무렵, 로코가 찾아왔다. "당신이 루시오입니까?" "어서오게, 로코." 로코는 평소와는 달리 껌도 씹고 있지 않았고, 얼굴 표정도 진지해 보 였다. 그는 문밖에서 모자를 벗어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폭신한 소파에 앉자, 루시오가 담배를 권했다. 로코는 얌전히 담배를 물고 라이타를 꺼 내 루시오와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 행동 하나하나가 굉장히 예 의바르고 공손했다. "나와 내기를 해보지 않으시겠어요?" 갑자기 로코가 말했다. 루시오가 계속 말해보라는 듯이 바라다봤다. "10만 달러만 투자해 봐요. 알프레드 디몽의 회사를 송두리째 당신께 갖다 드리리다. 그것도 15개월 안에 말이오." 알프레드 디몽은 파리의 백만장자였다. 로코는 '루시오와 타협할 수 있 을 만한 조건은 그가 노리고 있는 유럽의 다른 나라뿐이다'라는 걸 꿰뚫 어 보고 있었다. 로코에게는 자신이 있었다. 루시오도 꿀꺽 군침을 삼켰 다. 알프레드 디몽의 회사라면 아무리 작게 잡아도 싯가 5000-7000만 달 러는 나간다. "그래, 그래서, 자네가 이긴다면 내가 뭘 지불해야 하나?" "그저 <밀라노-엘바>의 자리 하나만 내 주십시오. 되도록 손하나 까닥 않고 계획만 짜는 -- 그러니까 머리만 굴리는 자리로요. 아시다시피 전 실행면에서는 빛을 못내거든요. 자랑은 아니지만 총도 쏠 줄 모르고, 소 매치기도 제대로 못하니까요. 하지만 이거 하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 을 자신이 있습니다." 로코는 둘째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래서 자네가 진다면?" "날 마음대로 하십시오. 죽이든지 살리든지 일생을 두고 노예로 부려먹 든지." "그거 좋은 생각이군. 매일 한 번씩 자네 머리위에 사과를 얹어놓고 권 총으로 쏘겠네." 이틀 뒤 루시오로부터 10만달러와 17살된 소년 하나와 파리행 비행기표 를 받은 로코는 곧장 파리로 향했다. 비행기 안에서 로코는 소년에게 물 었다. "꼬마야, 넌 뭘 할 줄 아니?" "훔칠 줄도 알고, 총도 쏠 줄 알죠. 하지만 제 전문 분야는 전기 배선 이랑 기계 만지는 거예요." "기계 만지는 거? 나쁘지 않군. 이름은?" "앨버트 테일러. 보통 '앨'이라고 많이 부르죠." "촌스러운 이름이군. 그건 그렇고, 꼬마, 넌 너 자신이 말재주가 있다 고 생각하니?" "여자를 죽도록 싫어하고 절대로 결혼따위 하지 않겠다는 독신주의자에 게 여자용 잠옷 여섯벌을 팔아본 경험이 있는 정도밖에 안 돼요." "여동생에게 선물하라고 달랬나?" "아뇨. 그 사람 한달 뒤에 결혼해서 지금 딸까지 있는 걸요." 로코는 이 꼬마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비서노릇을 하기에 부족 함이 없는 녀석이었다. 게다가 웃는 얼굴이 귀염성있었다. 파리에 도착한 즉시 로코는 작업에 착수했다. 다음 주 토요일, 알프레드 디몽은 수십통의 전화를 받아야 했다. 첫 전 화는 남부 지사가 부도를 냈다는 거였고, 두번째 전화는 그의 회사에 원 료를 납품해 오던 P.D. 회사가 문을 닫았다는 것이었으며, 세번째 전화는 그의 여비서로부터 온 것인데, 은행에 잔고가 없어서 대금 지불이 안 되 고 있으니 어서 회사로 나와보라는 것이었다. 네번째 전화는 은행에서 잔 고가 없는 것을 알려온 것이었고, 다섯번째 전화는 거액을 빌려갔던 회사 가 파산 선언을 했다는 정보였다. 여선번째 전화가 오기전에 알프레드 디 몽은 수화기를 내려놔 버렸다. 곧장 회사로 달려갔으나 회사에서도 모두 수화기를 내려놓고 걱정하고 있는 중이었다. 은행에 연락할 때마다 모두 한결같이 '잔고는 0'이라는 대답이었고, 잔고가 없는 사람에게는 신용 대 부도 해 주지 않았다. 알프레드 디몽은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고 미칠 것만 같았다. 아내 소피 디몽은 갖고 있던 보석을 급하게 팔아치웠 지만, 어림도 없는 액수였다. 친한 친구를 찾아다니며 빚도 얻어봤지만 막아야할 구멍은 점점 커져가기만 했다. 게다가 일단 부도가 났다는 것이 신문에 나기 시작하자, 신용 대부받았던 곳들에서도 무이자로 원금이라도 상환하라는 요구가 닥쳐왔다. 이렇게 정신없이 당황하고 있을 즈음에 30 대 중반 정도의 잘생긴 청년이 나타나서 회사를 사겠노라고 했다. "당신 미쳤군. 빚만 잔뜩 짊어진 회사를 사서 뭐하겠다는 거요!" 알프레드 디몽은 잔뜩 흐트러진 몰골로 공연히 언성을 높였다. "나에게는 그 정도 빚은 별거 아닙니다. 내가 그 빚을 모두 갚아드릴테 니 나에게 파시겠습니까?" "그래, 얼마를 내고 사겠단 말이오? 저 쓰러져 가는 회사를!" "빚 갚는 거 제외하고 일생 먹고 살 수 있는 정도의 연금을 드리겠습니 다." "고작 연금? 이 도둑고양이 같은 녀석이..." "싫으면 관두십시오. 저도 사업을 시작할 마땅한 자리가 없으니까 사려 는 거지, 누군들 빚더미에 올라앉고 싶겠습니까? 당신이 빚진 액수만 가 지고도 당신 회사 정도는 두 개쯤 살 수 있어요." 계약 성립. 단지 두 달 동안에 로코는 <연금>이라는 하찮은 돈으로 알 프레드 디몽의 회사를 송두리째 손에 넣은 것이었다. 그동안 신문에 파산 기사가 실리도록 상황을 조작하느라 돈이 좀 심하게 들긴 했지만. 이제 루시오 프란시스코의 이름으로 회사가 인계됐다는 기사 한 번만 더 실으 면 완벽하게 내기에 이기는 것이다. 이 기사는 돈이 안 든다. 실제니까. 그리고 다음날 아침, 모든 신문 제 1면에 그 기사가 실렸다. 로코는 조간 신문을 읽으며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그리고 앨버트에게 물었다. "이봐, 꼬마야. 아직도 6만달러는 족히 남았다. 여비는 충분하지?" "일단 성우들이랑 그 배우한테 좀 후하게 팁을 주세요. 비밀이란 새어 나가기 쉬우니까요. 아참, 그집 전화선도 제대로 해 놔야겠네." "그래, 가서 제대로 해 놓고 와라. 그리고 우리 유람선이나 타고 세계 나 한바퀴 돌자꾸나." 알프레드 디몽의 회사와 집에 전화선을 교묘히 연결하여 놓고 성우를 남녀 2명씩 데려다가 계속 <부도 전화>를 하게 했다. 물론 은행이나 다른 회사로 거는 확인 전화도 가로채서 '예, 잔고가 없군요.' 라던가, '죄송 하지만 이마 파산선고를 했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라는 식의 대답을 하도록 했었다. 알프레드 디몽과 거래를 한 회사들에도 각기 몇 통씩의 전화를 걸어 두었다. 처음 며칠이 지나자 각 은행들이 몸을 사리는 바람 에 실제로 대부도 안 되었고, 전부들 대금을 회수하려고 했기 때문에 상 황은 자연스럽게 로코가 원하는 대로 흘러갔던 것이다. 그리고 절정에 이 르렀을 때 잘 생기고 대 기업가 같은 분위기를 풍기면서 연기도 잘 하는 배우 -- 하지만 유명하지는 않은 -- 를 시켜 계약을 실행하게 한 것이었 다. 앨버트가 전화선을 제대로 해 놓고 나자, 그들은 곧 세계 일주 유람 선을 탔다. 그 날 떠나는 유람선에 날짜를 맞추느라고 꽤 애썼던 보람이 있었다. 아직 루시오와 맺은 계약기한은 1년도 넘게 남아 있었고, 또 파 리에 남아있다가는 만에 하나 경찰에 오가는 재수없는 일이 생길 수도 있 을테니까 미리 계획을 세워둔 것이었다. 세계일주는 8개월 예정으로 되어 있었다. 로코는 그 8개월 뒤에 어떤 일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지 알지 못했다. 그는 꼬마 앨버트를 얕보고 있었던 것이다. 알프레드 디몽에게는 자식이 셋 있었다. 하지만, 서른 네 살의 큰아들 쟈크는 꽤 알려진 외과의사로 4년전에 아프리카로 건너가서 그곳 의과대 학 교수로 근무하고 있었고, 서른 한살의 솔리아라는 딸은 미국인 야구선 수와 결혼하여 10년 가까이 미국에서 살고 있었으며, 막대아들 프란츠는 26세의 왕성한 혈기로 영국에서 <자기사업>을 하고 있어서 모두들 부모와 는 그다지 왕래가 없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에나 모이는 정도였으니까. 특히 프란츠는 부모와 만나기를 그다지 좋아하질 않았다. '내 사업을 이 어달라'는 소리를 듣는 게 싫었던 것이다. 쟈크가 과감히 의대에 진학해 버리자 알프레드 디몽은 줄곧 프란츠에게 기대를 걸었는데, 프란츠는 그 게 싫었다. 경영에 흥미도 있고 능력도 있었지만 '아버지를 잘 둔 덕분' 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진 않았다. 프란츠는 경영대를 졸업하자마자 곧 <독자적>으로 갖가지 <사업>을 시도해 봤었지만 '네 사업 말고 <내사업> 을'을 주장하는 아버지의 끈질긴 방해 때문에 끝내 영국으로 달아나 버린 것이었다. 영국에서 그는 대학시절의 동창 두명과 함께 라는 이름으로 광고업을 하고 있었다. 벌써 3년째에 접어든 이 사업은 그런대로 잘 되어 나가서 그럭저럭 먹고 살만은 했고, 또 약간의 돈도 모았다. 그러고 있을 때 프 란츠는 신문에서 아버지의 회사가 양도되었다는 것을 읽고 분노했다. 그 는 아버지를 존경했고, 아버지의 회사에 얼마만한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 있는지를 알고 있었기에 분노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것 이 실제일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 회사는 대기업이다. 그렇게 쉽게 망할 수는 없다. 그는 즉시 프랑스로 돌아왔다. 공항에서 내리자, 기자 생활을 하는 친구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친구는 아버지의 회사 부도 기사는 실제로는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아냈다고 알려주었다. 또한 회사의 새 주인 루시오 프란시스코는 이탈리아 <밀라노-엘바>의 단 장이라는 것도 알려주었다. 각 신문사에서는 이것이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회사가 넘어간 것은 사실이니 이제와서 새로이 들추어서 자기 신문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싶어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회사의 명예가 걸린 일이니 절대 비밀로 해 달라'고 했다. 집 에 돌아온 프란츠는 형편없이 초췌해진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고, 표정이 없어진 석고상 같은 어머니를 보았다. 그리고 복수를 꿈꾸며 '밀라노-엘 바'라고 자꾸만 중얼거렸다. 로코가 프랑스를 떠난지 7개월 후 알프레드 디몽의 것이었던 회사는 다 시 프랑스인 샤를르 코엔의 손으로 헐값에 넘겨졌다. 꼬마 앨버트의 친구 가 앨버트가 시킨대로, 회사의 값나가는 것들을 전부 팔아버린 다음에 싸 게 양도한 것이었다. 이로써 기분나쁜 미국인 로코는 <밀라노-엘바>에 가 입할 수 없게 되고, 단장은 앨버트의 머리를 두 번쯤 쓰다듬어 줄 것이었 다. 샤를르 코엔은 알프레드 디몽의 집에 전화를 걸어서 연락을 취하려 했 지만 알프레드는 술에 젖어서 살고 있었기 땡문에 프란츠 디몽과만 이야 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부도 사건이 가짜였다는 것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 랐다. 샤를르는 알프레드를 굉장히 존경했었기에 동업해 볼 수 없겠느냐 고 전화를 했다가 의외를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샤를르 코엔과 프란 츠 디몽을 중심으로 <밀라노-엘바>에 대적하는 단체 가 만들어 진 것은 그로부터 2년 후였다. 모두 다섯 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전부 <밀라노 -엘바>를 지독히 싫어하는 사람들이었다. 프란츠 디몽 외의 다른 네명은 모두 30대 초반의 사람들로 젊은 아내와 어린 자식들이 있었다. 그래서 복수심은 컸지만 가족들을 보호하겠다는 마음이 그들의 실행을 저지시키 곤 했다. 그저 노려보기만 하는 동료들에게 싫증이 난 프란츠는 새로운 방법을 제안했다. 즉 산골에 별장을 지어놓고 그 동료의 아들들을 교육시 키자는 것이었다. 처음엔 아들들만 교육시켰지만 차차 다른 소년들도 교 육되어졌다. '이놈, 체격이 좋군.'이라든가 '야, 너 이탈리아를 싫어하는 구나.' 따위의 소리를 들은 아이들이 산장으로 보내졌다. 온갖 스포츠와 언어, 그리도 도둑질과 사기술로 단련된 아이들은 20대가 되자 무서운 것 이 없었다. 그래서 그 중의 다섯을 중심으로 한 제 2대 가 구성되 었고, 40대 후반으로 접어든 제 1세대 는 자금지원만을 하는 사업 가들로 물러나 버렸다. 제 2대의 다섯 청년들은 어려서부터 살벌한 교육을 받고 자라났기 때문 에 제 1대의 느슨한 활동방법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최선의 자본이 뒷받침되는 한도내에서 그들 나름대로의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밀라노-엘바>를 비롯한 모든 이탈리아 단체와 대적하면서, 또릿 또릿한 6-7살된 사내아이들을 비밀히 물색해서 자신들이 자라왔던 식으로 교육시켰다. 10여년 동안에 이탈리아인이 경영하던 회사 7개가 의 손에 들어왔고, 30대가 되어버린 핵심 멤버 다섯은 제 3대 에게 주 도권을 넘겨주고 넉넉한 자본을 대주기 시작했다. 핵심멤버 다섯을 제외 한 다른 사람들은 30대가 되건 40대가 되건 계속 활동하면서 핵심멤버를 도왔다. 제 3대 는 자본이 눈에 띄게 많았던 시기였다. 이탈리아를 비롯 한 세계 각국에 별장을 세우기 시작했는데, 그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 다. 다른 나라에서 이탈리아 회사를 하나씩 삼킬 때마다 <파파의 집>이 하나씩 세워지곤 하니까. 그후 검은 양복에 곤색 넥타이를 착용하는 걸로 의 표징을 삼기 시작했고, 곳곳에서 자동 자료 정보처리 시스템이 아이들의 교육 정도와 특기 따위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제 3대는 7년 후 제 4대에게 자리를 내 주었다. 제 4대는 제 3대가 미국과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것을 바탕으로 그밖에 <밀라노-엘바>가 관련된 곳, 이탈리아 마 피아가 관련된 곳이라면 어디든 서슴지 않고 쫓아가 방해를 놓았기 때문 에, <밀라노-엘바>도 이젠 를 원수로 여기고 있었다. 지금은 제 4 대 멤버가 활동한지 5년 가까이 되었다. 아직도 핵심멤버는 다섯명이지만 17세 이상의 2차 멤버는 150명 가량 되고, 6세에서 17세까지의 교육중인 아이들은 60명 가까이 된다. "앙트와느가 늘 검은 양복에 곤색 넥타이를 맸던 걸 기억하지요?" 마리가 물었다. 멍하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크리스토퍼가 고개를 끄덕 였다. 저 멀리에 막 떠오르는 새벽의 태양빛을 받으며 눈부신 알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참, 클로우버 이야기를 안 했네. 왜 있잖아요, 앙트와느가 늘 사용 하던 넥타이핀 말이예요. 네잎 클로우버가 세개 모여있는 모양을 하고 있 는." "에메랄드가 박혀 있는 거 말이지?" 크리스토퍼는 그 넥타이핀을 볼 때마다 마리의 눈동자를 연상하곤 했던 옛날의 자신이 생각나서 씁쓰레 하게 웃었다. "그래요, 크리스. 그것도 의 상징이예요. <영원히 매력적인 파리 의 천사>에 어울리는 물건이잖아요?" "그런데 도대체 그 라는 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에는 그때그때 필요할 때에만 활동하는 임시 멤버들이 수없이 많아요. 당신도 나도 모두 그 임시멤버에 해당하지요. 임시 멤버들은 원 래 에 관해선 하나도 모르고 그저 위에서 멤버가 시키는 대로만 하 는 게 정상이지만, 난 앙트와느의 동생이라는 명목으로 고집을 부려서 이 만큼 알고 있는 거예요." "내가 임시멤버?" 크리스토퍼가 중얼거리듯 되물었다. "그래요, 임시멤버. 하지만 당신은 능력면에서는 2차 멤버에 그다지 뒤 지지 않으니까 이번 일에 적합하지요. 지금 정식 멤버들은 꼼짝도 못하고 있거든요." "왜?" 마리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잠시 그대로 있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의 명단이 그들의 손에 들어갔어요. 152명 전원의 명단이. 그리 고 벌써 14명이 그들의 손에 끌려갔어요." 크리스토퍼도 침을 꿀꺽 삼켰다. "쥬엘만은 구해내야 하는데!" 마리가 갑자기 맥이 탁 풀린 목소리로 외쳤다. 크리스토퍼는 불현듯 정 신이 퍼뜩 나서 물었다. "쥬엘? 쥬엘 실버 오스몬드 말이야?" "쥬엘을 알아요, 크리스?" "알고말고. 우리학교 테니스부인걸." "쥬엘이 앨런 사모아 고등학교의 학생이라고요? 왜 하필 그 학교일까? 사실 고등학생이라는 것 자체도 의 멤버에겐 우습지도 않은 일인 데." "쥬엘이 의 멤버라고?" 크리스토퍼는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쳤다. "그래요. 여자애는 그애 하나예요. 그 애는 키우기가 훨씬 힘들었다나 봐요. 5명의 핵심 멤버 중 한 사람이 계속 곁에서 가르치고 이끌어야 했 다니까요." 크리스토퍼는 이제 모든 게 이해가 갔다. 쥬엘이 왜 그렇게 차갑고 마 음을 털어놓지 않았는지. 왜 그렇게 주먹이 세고 인내심이 강한지. 훈련 이라 -- 얼마나 힘들었을까? "우리는 임시 멤버라서 명단에 없거든요. 그러니까 조금 자유롭게 <밀 라노-엘바>가 하는 짓을 살펴볼 수 있죠." "쥬엘도 잡혀갔다고 했지?" "그래요. 72시간이 채 못됐으니까 아직은 살아있을 지도 모르지만." "어서와, 알렉스." "오랜만이예요, 앙트와느." "아직도 나에게 유감있는 건 아니겠지?" "네? 유감이라니요?" "네가 가버린 뒤에 네방 벽장에서 박살난 기타를 발견했었지." "아, 미안해요, 앙트와느. 그 땐 왠지 모르게 화가 나서." 크리스토퍼는 겸연쩍게 웃었다. "미안한 건 나야. 어지간 하면 너까지 부르지는 않으려고 했는데..." "얘기 들었어요. 마리한테서. 명단이 그들 손에 들어갔다면서요?" 앙트와느가 화난 듯이 마리를 바라다봤지만, 마리는 혀를 낼름거릴 뿐 이었다. "맞아. 그것도 멤버 전원의 이름과 특징, 현재 직업과 주소 등 신상 명 세서 전부가 말야. 그리고 벌써 열 네명째 소리없이 사라졌어." "당신이 아직 무사해서 다행이예요." "그런데, 알렉스, 너 3-4년 전에 알프스에 왔을 때 나흘간 행방불명 된 적이 있었지? 피투성이가 돼서 돌아왔었잖아. 기억나나?" "네. 알프스 산맥 중간쯤에 있는 동굴에까지 끌려갔었는데 어떤 미친 할아버지가 살려줬죠. 호랑이 비슷한 묘한 놈이 달려들기에 한참 싸웠었 는데, 그놈이나 나나 거의 동시에 지쳐서 쓰러졌거든요. 그러니까 그 할 아버지가 나타나서 길을 알려주고 돌아가라고 했어요. 하긴, 길을 알려줬 다기보다 방향만 가르쳐 준거였지만. 지금 생각하기에도 악몽이예요." 크리스는 기억하기조차 싫은지 상을 찡그렸다. "그 사람이 누군지 지금도 기억할 수 있니?" "예. 보면 알 수 있어요." 곁에 있던 피에르가 다섯장의 사진을 건네 주었다. 그는 팔장을 끼고 벽에 기대어 서서 알렉스와 앙트와느가 이야기 하는 걸 조용히 듣고 있던 중이었다. "이 사람이예요. 이 사진에는 수염이 없지만 틀림없어요." 앙트와느는 그 사진을 들여다 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피에 르를 보더니 나직히 말했다. "디노야. 벌써 5년 가까이 행방불명된." 피에르는 잠시 그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치 굳어버린 것 같았다. 그러다가 크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담배를 꺼내 물면 서 힘없이 중얼거렸다. "디노... 그렇다면 가망이 없군." PART 7. 디노 "이봐, 쥬엘, 이제 그만 일어나는 게 어때?" 쥬엘은 눈을 떴다. 루엔 콜리의 빈정거리는 듯한 얼굴이 보였다. 쥬엘 은 딱딱한 나무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뒷골이 뻐근해 왔다. "그래, 착한 아이로군. 이제 잠은 지겹도록 자게 될텐데, 뭐. 영원히 말야." 침대곁에 서 있던 루엔은 싱긋 웃고는 쥬엘 곁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여기가 어디지, 루엔?" "허, 기억력이 그렇게 둔한가?" "동굴 안으로 들어갔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지만..." "여기가 그 동굴안이야." "그렇다기엔 너무 예쁜 방인걸." 쥬엘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책이 빽빽이 꽂힌 책상과 커다란 책상 이 하나씩, 그리고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긴 의자가 두개 마주보고 놓 여있었으며, -- 그 중 하나에는 스파트 피렌이 자고 있었다. -- 한쪽 구 석엔 전기 난로가 있었고, 천장에는 형광등이 매달려 있었다. 온도도 밝 기도 꼭 알맞은 상태였다. "이렇게 만드느라고 비용이 꽤 들었지. 이 동굴안은 네가 생각하고 있 는 것보다 훨씬 넓어. 이런 방만 해도 네 개나 있으니까. 마치 개미집처 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맞을 거야." "그중에 내가 죽을 방도 있겠군." 쥬엘이 무감정한 것처럼 내뱉자, 루엔은 씨익 웃으면서 쥬엘의 머리를 마구 부벼 헝클어뜨렸다. "귀여운 녀석. 하지만 틀렸어, 쥬엘. 네가 죽을 곳은 <방>이 아니라 <길>이야. 넌 미로에서 죽게 되어 있거든." "미로? 그거 재미있겠는데. 그렇지만 내게도 <미로>라고 할 수 있을까? 난 길 찾기엔 프로급인걸." "어! 쥬엘, 일어났구나." 갑자기 스파트의 졸음에 겨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쥬엘은 그쪽을 돌 아다보고는 환하게 인사했다. "잘잤어, 스파트? 피곤해 보이는데?" "아니, 별로 피곤하진 않아. 너야말로 머리꼴이 말이 아닌 걸 보니 되 게 피곤했던 모양이구나." 스파트가 낄낄거리고 웃자, 쥬엘은 루엔 콜리를 한번 째려보고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빗을 꺼내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먹을 걸 좀 갖다 주지. 어차피 <최후의 만찬>이 될테니까." 루엔 콜리가 벌떡 일어나서 나무 판자로 된 문을 밀치고 나가버리자 스 파트 피렌이 쥬엘 곁으로 와서 앉았다. 쥬엘은 그를 힐긋 쳐다보았다. 형 광등 빛에 반사된 금발이 눈이 부셨다. "이상해, 그렇지?" 스파트가 물었다. "뭐가?" "대체 너같은 애를 죽여서 어쩌겠다는 걸까?" "조용히 잠자코 있어. 괜히 당신까지 죽게된단 말야." "네가 머리를 빗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살아있으니까 예쁘게 보이고 싶어하는 거 아닐까, 죽어버리면 그만인데 왜 머리를 빗을까 하는 생각 말이야." "난 죽지 않아." "나도 그러길 바래." 쥬엘은 스파트에게 빗을 내밀었다. 스파트가 머리를 빗었다. "저 형광등은 어쩡게 전기를 끌어다 댄 것인지 알고 있어, 스파트?" "자가발전이 되는 모양이더군." "자가발전... 과연 굉장한 비용을 감수해야 했겠군. 안토니오 피렌이 아니면 꿈도 못 꿀 일이지. 그래, 5년전에 명목없이 상당액수를 방출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이 동굴 때문이었다고 하면 말이 되는데." "뭘 그렇게 중얼거려?" "그저." 스파트 피렌이 갑자기 뒤로 벌러덩 누워버렸다. 그리고는 '루엔이 식사 를 가져 오거들랑 깨워줘.'라고만 하고 잠이 들어버렸다. 쥬엘은 스파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확실히 잘 생긴 얼굴이 었다. 앨런 사모아 고등학교의 여왕 유토피아 피렌의 사촌오빠로서 조금 도 손색이 없었다. 게다가 이 금발 -- 탐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루엔 콜리나 듀렌 테일러의 거칠음과는 다른, 귀공자 같은 깔끔함이 있었 다. 아무리 봐도 이런 산골에서 나무침대에 누워 자야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2분쯤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쥬엘은 일어나서 책이 빽빽히 꽂혀있는 책 장앞으로 다가갔다. 야호! 책 제목들을 죽 훑어보다가 이탈리아어로 된 <로마의 전성시대>를 발견한 그녀는 탄성을 올렸다. 당장 그 책을 뽑아들 고 소파에 깊숙이 기대앉아 탁자위에 긴 다리를 겹쳐 얹으며 -- 책읽기엔 가장 편한 자세이니까 -- 읽다 만 곳을 찾았다. 어젯밤의 별장에 있던 불 어로 된 원서도 꽤나 손때 묻은 것이었지만 이책은 더했다. 군데군데 줄 이 쳐져 있었고, 너무 닳아서 찢어진 곳을 스카치 테이프로 깔끔히 붙여 놓은 곳도 여러군데였다. 하여간 쥬엘은 곧 책에 몰두했다. 다섯장쯤 읽 었을 때 루엔 콜리가 식사를 들고 들어왔지만, 쥬엘은 돌아보지도 않았 다. 그저 죽기전에 -- 만일 정말 죽는다면 -- 3분의 1쯤 남은 이 책을 끝 까지 읽어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무슨 책을 그렇게 열심히 읽지?" 루엔이 쟁반을 탁자 위에 놓고 다가와 어깨너머로 들여다보았다. "로마의 전성시대인가?" 쥬엘은 고개를 들어 루엔을 쳐다봤다. 루엔이 씨익 웃었다. "식사나 하고 읽지 그래. <로마의 전성시대>를 읽을 동안만 시간을 달 라고 하면 디노 영감도 쾌히 승낙할 테니까 급할 것 없잖아." 루엔은 쥬엘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침대로 가서 스파트를 깨웠다. 쥬엘 은 탁자로 가서 앉았다. 베이컨이 제법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책을 엎어 탁자 위에 놓고 쥬엘은 그들과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케리가 돌아왔어!" 피에르의 기쁨에 찬 목소리가 온 집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케리가 누구지?" 앙트와느가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물었다. "쥬엘을 미행하라고 시켰던 발빠른 녀석 말야. 녀석들 본부의 정확한 위치까지 알아가지고 건강한 몸으로 돌아왔다네!"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앙트와느의 목소리는 피에르보다도 더 커져 있었다. "피를 비닐봉지에 담아서 다리에 매달아 둔 것이 다행이었네. 표창 던 질 때 비닐 봉지를 터뜨렸고, 다리에서 피흘리는 녀석은 쫑을 필요없다는 게 산속에서의 철칙이니까." "그래. 어쨌든 잘 됐네. 이젠 계획을 짤 수는 있겠구만. 디노영감에 대 한 철저한 계획을." "캐디, 스페인어 시험 잘 봤니?" 낸시 스왈러가 캐더린 피킨즈에게 물었다. "말도 마, 낸시. 내가 언제 스페인어 시험 잘 보는 거 봤니?" "물론 못 봤어. 하지만 혹시 기적이라도 일어났나 해서 물어본 거야." 캐디는 낸시를 향해 눈을 흘겼다. 사실 캐디는 시험 기간에 갑자기 증 발해 버린 쥬엘의 걱정을 하느라고 원래 그다지 좋지 않은 성적이 가뜩이 나 더 자신없어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왠지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은 생각에 두려움이 일어서 며칠째 한숨도 못 자고 있었다. "낸시, 방학동안에 뭘 할거니?" 캐더린 피킨즈가 물었다. 프랑스 여행이나 갈까 해. 거긴 안개도 없고 햇볕이 좋다니까. 넌 테니 스 합숙에 따라간다니까 바쁘겠구나. 공 주우러 다니느라구." "응. 쏟아지는 햇볕 아래서 매일 한 시간의 수영과 겸해서 공을 주우러 다녀야지." "나쁘지 않겠네. 캐더린, 너 합숙하는 데 따라가면 안 될까?" "우리 합숙에? 힘들껄. 부원인 사람은 희망하는 대로 다 가능하지만 부 원 아닌 사람은 힘들 거야. 어차피 지구대회 붙은 사람 위주의 프로그램 이니까. 차별이 대단해. 지구대회 메달리스트는 무료, 우리는 자비부담." "로렌스 선생님도 따라가신다는데 뭐." "율리아 로렌스 선생님이? 킥킥. 코우치가 단단히 마음에 들었나 보 지?" "아참, 너네 요번 합숙은 프랑스에서 할 거라는 소문이 있던데?" "응. 코우치가 그랬대. 배로 가면 비용을 최소로 들여도 된다구. 그래 서 벌써 답사 차 프랑스로 갔다더라." "가고 싶다." "가봤자 뭐, 우린 맨날 연습하느라구 바쁠텐데 뭐하게?" "로렌스 선생님이 하실일. 수건 갖다주고, 물 떠다주고, 공도 주워다 주고." "글쎄, 그럼 그리스 테일러한테 물어 봐. 코우치가 떠나면서 임시로 모 든 권한을 그리스한테 넘기고 갔으니까." "디노가 만나고 싶어한다, 쥬엘." "마지막 만찬이 아니었나? 이왕이면 배고파지기 전에 죽여주시면 감사 할 텐데..." "모르겠어. 디노의 생각을 알 수 있어야 말이지. 어쨌든 그가 죽이라고 해야 죽이는 거니까. 이 동굴에 들어온 사람 중에 이렇게 오래 살아있었 던 사람은 별로 없었는데, 너에게서는 뭔가 정보거리가 있는 모양이야. 디노는 쓸모없는 사람은 결코 오래 살려두지를 않으니까. 뭐 아는 게 있 거든 얼른얼른 말해 버리라구, 꼬마. 디노는 무서운 사람이야. 우리처럼 생각했다간 큰코 다칠껄. 이건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고 알아두길 바 래." 디노 레콘. 그에 대해 파파가 조사해 준 자료는 그다지 완벽하지는 않 았다. 다만 예전에 <밀라노 엘바>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적이 있는 사람 이라는 것은 알려주었었다. 그 사실과 빨간 별딱지가 호기심을 일으켜서 쥬엘이 따로 자세히 조사해 두기는 했지만. 파파는 나를 위해 모든 걸 다 조사해 주기에는 너무 바쁘단 말야. 쥬엘은 루엔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서자 정말로 왼쪽 오른 쪽이 바위로 되어 있는 동굴안이어서 깜짝 놀랐다. <자가발전>이 된다는 전기를 사용한 듯, 동굴을 따라 천정에는 전선이 드러나 있었고, 백열등 이 일정한 간격으로 붉을 밝히고 있었다. 30발자국쯤 걸었을까. 앞에 나무문이 나타나고 루엔은 문을 두드렸다. "디노, 쥬엘을 데려왔어요. 혹시 뭔가 정보를 얻어내려 하는 거라면 제 가 도울 수 있을 텐데요, 헤헤." "들여 보내고 꺼져!" "그러죠." 루엔이 시무룩히 대답하더니 쥬엘을 문 안으로 확 들이밀었다. 쥬엘은 휘청하면서 문안으로 들어섰다. "아참, 디노. 이것만 말씀드릴께요. 이 아가씨가 지금 <로마의 전성시 대>를 읽고 있어요." "내가 방금 자네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나?" "예예, 꺼지겠습니다." 루엔은 투덜거리며 문을 닫고 사라졌다. "왔군, 귀여운 아가씨."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탈리아어였다. 방안은 어두웠으며, 조금 전까지 쥬엘이 있던 방 보다도 더 간소했다. 커다란 책장하나와 소파 한 세트 뿐으로, 아파트의 응접실 정도 크기였다. "디노 레콘?" "그래. 내가 디노일세." "만나서 반갑군요. 쥬엘 실버 오스몬드예요." 자기보다 강한 듯한 사람을 만났을 때에는 인사를 깍듯이 하라. 파파가 가르쳐 준 말이었다. 언제나, 어디서나, 상대편 국적이 무엇이건, 상대를 알건 모르건 간에, 자기보다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지식으로 알거나 육감 으로 느끼게 되면 무조건 인사를 깍듯이 하라. -- 반드시 영어로. 파파가 가르쳐 준 말이었다. "영어를 좋아하나? 이탈리아어가 더 아름답지 않은가?" 여전히 이탈리아어였다. 디노의 말투는 느긋했다. "후후. 죄송합니다, 디노. 첫인사는 영어로 하는 습관이 붙어있어서 요." 쥬엘은 비로소 이탈리아어로 말했다. 쥬엘은 원래 영어로 말하는 것보 다 상대편 국적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상대편이 말하는 어 딘가 모르게 엉성한 영어를 들으며 답답해 하느니 보다는, 차라리 쥬엘편 에서 상대방의 언어로 말하는 편이 훨씬 의사소통이 잘 되고 시원시원했 던 것이다. "그래? 음. 그럴 법도 하군. 어쨌든 이탈리아어 발음이 좋으니 다행이 군. 지금까지 여기왔던 파파의 멤버들의 발음은 불어인지 이탈리아어인지 모를 지경이었단 말야. 자, 앉지." 디노는 문을 향해 앉으며 쥬엘에게 맞은 편 의자를 가리켰다. 문을 등 지고 앉는 것은 적진에서는 상당히 기분나쁜 일 -- 문에서 부하들이 총을 겨눌 가능성 때문에 -- 이지만 할 수 없었다. 또한, 디노 레콘, 이 사람 이라면 그렇게 째째하게 굴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조금은 느긋해 하 기로 했다. "자네는 지금 국적이 미국으로 되어있지? 어쨌든, 나같은 사람한테도 그렇게 예의를 지키는 것보니, 피에르가 열심히 키운 애 답군. 그런 깍듯 한 인사를 받아본 적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는걸. 어디 보자. 머리 색이 원 래 그렇게 검은가? 미스터 로슈의 딸은 실버블론드로 알고 있었는데..." "미스터 로슈가 누구지요?" 아무런 감정 없는 목소리였다. "그래? 정말로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매정한 딸이로군." "글쎄요.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신 것 같은데요. 로슈라니. 제가 아는 사람 중에는 그런 이름이 없는 데요. 제 아버지의 이름은 윌리엄 오스몬 드였어요. 이젠 돌아가셨지만." 디노는 쥬엘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든지 그 앞에서는 사실 을 자백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은 눈이었다. 아주 예리한, 그러면서도 음침한 기분나쁜 눈. 쥬엘은 아주 침착했다. 누가 봐도 의심치 않을 표정이었다. 쥬엘은 지 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혹시 지금 아버지를 떠올린다면, 혹 은 과거를 생각해 보려 하거나 한다면 아버지의 이름이 앙드레 알베르 로 슈라는 것을 도저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차례에 걸친 훈련 결 과로 이 이름이 나오면 습관적으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되긴 했지만, 그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 "그래, 그건 아무래도 좋아. 자네가 누구의 딸이었건 간에 지금은 파파 의 멤버인 쥬엘 실버 오스몬드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말야. 지금 몇살인가?" 디노는 시선을 돌렸다. 첫단계 탐색이 끝난 듯 해서 쥬엘은 하마터면 안도의 한숨을 쉴 뻔 했다. "열 여덟인데요. 아직 충분하지는 않은 나이지요." "충분하다니? 파파의 활동을 하기에 말인가?" "아니요. 천만에요. 파파의 활동을 하기에는 충분하다고 자부하고 있지 만, 죽어버리기에는 그다지 충분하지 않은 나이잖아요?" 쥬엘은 디노에게 미소지었다. "음, 그렇게 따지자면 너보다야 내가 충분한 나이로군 그래. 하지만 할 수 없지. 파파와 연관을 맺은 게 잘못 된 거였어. 네 잘못이 아니야. 하 지만, 이세상에는 무슨 이유건 꼬마, 너 만한 나이에 저세상으로 가는 사 람들이 수두룩하지. 정말 많다구. 채 흰머리가 돋아나기도 전에 저세상으 로 일찌감치 가버리는 사람들이 엄청나다니깐." "쁘띠 엘레나처럼요?" 쥬엘의 목소리는 차가왔다. 쁘띠 엘레나. 안토니오의 현재 부인과 디노 사이에 태어났었던 단 하나의 자식. 그녀는 네살때 유괴범에게 잡혀가서 결국 시체조차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되어있었다. 유괴범은 단순히 혼자 놀고 있는 어린애를 유괴했다가, 그녀가 디노 레콘의 딸인 것을 알고는 돌려주지도 못하고 돈을 요구하지도 못 한채 그대로 종적을 감추어 버린 듯 했다. 디노는 잠시 아무말이 없었다. "그래... 엘레나 레콘. 그 아이처럼 말이지." 쥬엘은 그 목소리가 조금은 시무룩해졌다고 느꼈다. 역시 이 사람도 한 아이의 아버지였던 사람이로군. 난 비록 내 아버지의 존재까지 철저하게 거부할 정도로 못난 딸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야. 쥬엘은 디노의 옆모습에 잔잔히 어리는 딸에 대한 그리움을 엿보며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로마의 전성시대>를 다 읽으려면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가, 쥬엘?" 갑자기 디노가 쥬엘을 향해 물었다. 어느새 날카롭고 침착하며 냉정한 원래의 디노 레콘으로 돌아가 있었다. "예? 아. 3분의 1쯤 남았는데, 잠도 자고 해야 하니까 내일 아침까지 만 시간을 주시면 될 거예요." "여기 온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렇게 많이 읽었단 말이야?" "여기 오기 전에 머물렀던 별장에도 그 책이 있더군요. 이탈리아어가 아닌 불어로 된 원서였지만. 반 정도는 거기서 읽고 왔지요. 저녀석들은 내가 그 책을 빤히 읽고 있는 걸 보면서도 여전히 내가 불어나 이탈리아 말 따위는 전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우스운 일이지만." 디노가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 저 녀석들은 다 바보지. 몽땅 다 말야. 그리스 테일러를 유토피 아와 같은 학교에 넣을 정도로 바보들이란 말야." 쥬엘의 머리는 갑자기 급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스 테일러. 역 시 뭔가가 있긴 하구나. 듀렌 테일러를 나무라는 말이겠지. 하긴, 처음부 터 그리스가 이상하게 느껴지기는 했었지만. 가만있자, 그리스의 일을 듀 렌이 몰랐다고? 그렇다면, 그리스와 듀렌은 서로 아무런 관련없이 서로 다른 작업을 벌이고 있다는 셈이 되잖아? 이런. 양쪽 다 막으려면 꽤나 힘들겠군. 과연 안토니오 피렌 같은 거물을 무너뜨리려니 인력 소모가 많 단 말야. 경쟁자도 많고. 투덜. 그건 그렇고, 그리스 테일러와 유토피아 를 같은 학교에 넣은 것이 디노는 불만인 모양인데, 그렇다면 디노는 누 구편인 것일까? 나처럼 유토피아를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그리스를 경쟁자 로 돌리는 것일까, 아니면, 유토피아를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그리스를 적 으로 보는 것일까? 양쪽 다 가능성은 있어. 좀 더 두고봐야 겠는걸. "그럼요, 바보들이지요. 내가 유토피아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것도 알 아채지 못한 녀석들이니까요." 디노가 놀란 듯 쳐다보았다. 섬뜩한 눈이었다. 쥬엘은 그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보일듯 말듯하게 미소를 지었다. "넌 왜?" "그저, 유토피아와 친해두고 싶어서지요. 부잣집 따님과 친해 두어서 나쁠 것은 없지 않겠어요? 유토피아에게 제 이름을 대면 꽤 반가와 할 걸 요. 아, 물론 그리스 테일러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쥬엘은 여유있는 듯 팔짱을 끼며 디노의 표정을 살폈다. 디노는 잠시 혼란해 진 것 같았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 아무런 말없이 그의 오른쪽 벽에 걸린 그림을 쳐다보며 왼쪽 소파의 왼쪽 팔걸이에 기대 어 앉아 있었다. 디노. 과연 대단한 집중력이군. 저 눈, 전혀 그림을 보고 있지 않아. 초고성능 컴퓨터처럼 머리속에서는 엄청난 속도로 계산을 하고 있을 거 야. 쥬엘은 전율을 느꼈다. 이 동굴에 들어온 후로 처음 느껴지는 공포였 다. 이 사람,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서 가장 대단한 사람이다. 내가 정말 거물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아무래도 안되겠어. 자네가 직접 움직이는 것은 너무 위험해." 앙트와느가 해쓱한 얼굴로 말했다. "후후. 핵심멤버란 언제나 희생타잖아. 5년만 쓰고 버리는. 5년 후엔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하고 허울좋은 사업가, 자금지원 담당이라는 <명예 직>으로 물러나게 되어 버린다구. 그런 생활은 다 소모되고 남은 찌꺼기 로 만드는 쓰레기바구니나 같아. 5년 동안에 있는 힘을 다해 몸을 탕진하 라, 그러면 나중에 보트나 타고 자가용 비행기나 전세내서 다니는 편한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해 주겠다, 이거잖아. 나는 다음대 핵심멤버들에 게 욕먹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아. 이젠 우리대도 2년밖에 안 남았어. 다 음대 핵심 멤버에는 쥬엘이 끼게 되겠지. 쥬엘이 활동을 하는 데도 나 는 파파의 활동은 하나도 못 하는 채 자금지원만 해야한다구.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아는가?" 파파의 웃음은 허탈하게 느껴졌다. "모르지. 알고 싶지도 않고. 어쨌든, 자네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어. 이 정도의 일은 알렉스도 충분히 해 낼 수 있을 거야. 이제와서 말하는 거지만, 저 녀석의 능력은 두려울 정도야. 2년 전에도 거의 나와 비슷한 정도였으니, 지금쯤은 나를 능가할 지도 모르지. 게다가 나나 자네가 움 직이는 것은 위험하지만 저 녀석은 명단에도 없어. 그러면서도 이 일을 결코 거절한다거나 엉망으로 해버리거나 하지는 않을 정도로 책임감은 있 는 녀석이란 말일세." 파파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렇군. 명단에 없다면, 오히려 내가 하는 것 보다도 성공률이 높을 수가 있지. 능력은 어찌되었건 간에 말야. 게다가 자네가 두려워할 정도 의 실력을 가졌다면, 한번 믿어볼만도 하겠는걸." "마리가 울고불고 난리를 치겠지만, 쥬엘을 구해내기 위한 거라면 괜찮 을 거야. 그애가 쥬엘 걱정을 그렇게 해 줄 줄은 몰랐는데. 그애가 남을 그렇게 생각하는 건 처음 본다니깐. 쥬엘이 단단히 맘에 든 모양이야. 마 리는 원체 남들한테 귀여움만 받고 자라서 남을 생각해 주는 법을 잘 모 르는 아이였거든. 남이야 귀찮건 바쁘건 간에 자기를 위해서 뭐든지 다 해주기를 바라곤 했으니까. 그리고 그걸 당연한 걸로 여겼고." "후후... 공주님이었군." "하하하... 맞아. 바로 그거야. 어쨌든, 그러면 여기에 알렉스를 집어 넣고, 자네가 이걸 맡으면 어떻겠나? 별로 표시도 안 나면서 제대로만 한 다면 효과가 클거야." "아, 그것도 좋겠는걸. 어디 보자, 그래, 그렇게 된다면 항상 알렉스 곁에 있을 수 있으니까 그게 가장 확실하겠군. 혹시 알렉스가 갈피를 못 잡는다면 도와줄 수도 있겠구 말야. 역시 예나 지금이나 앙트와느는 지략 가라니깐." "인정해 주니 고맙네. 경력이란 그런 거 아니겠나. 내가 제대로 활동을 시작한 건 벌써 20년이 가까와 오니까. 내가 자네보다 6살이나 위라는 것 을 잊지 말게나. 지난 대의 핵심멤버에 2점 차이로 떨어졌으니만큼 난 내 능력에는 자만하고 있지. 지금도 그다지 다른 사람한테 질 정도라고는 생 각지 않아. 물론 자네와 붙는다면 좀 확실히 이긴다고 보장은 못하지만." "하하, 난 쥬엘을 키운 것이 능력이 인정이 돼서 점수를 크게 땄지. 그 바람에 핵심멤버가 되어 버렸지만. 거의 모든 것에 A+를 받게끔 키웠으니 까. 내 <실력>이 인정됐다기 보다는 <경력>이 인정된 것이 아닐까 하는 데." "후... 어찌됐건, 파파가 <영원히 아름다운 파리의 천사>로 남아 있을 수 있다면 좋을텐데. 지금 하는 짓은 천사보다는 악마에 가까운 것 같단 말야." "키우기 나름이지. 난 우린 악마에 가깝더라도 쥬엘은 오히려 천사에 가깝다고 생각하니까." "이 친구 단단히 빠졌구만." "그래, 난 쥬엘한테 반했지. 부모가 자식에게 반하고 끝없는 사랑을 주 듯이. 키우는 재미라는 게 이런 거 아닐까?" "장가갈 때가 됐구만. 자식 키우는 재미에 살맛 난다는 소리를 다 하다 니. 자네는 나보다 6살이나 어리지만, 가끔 더 어른스럽게 느껴지곤 한다 니까. 그런데, 부모처럼이라니, 정말인가? 전혀 아무런 사심없이?" "아아, 재미없군. 계획이나 검토해 보자구. 알렉스를 불러 주게." 시계가 6시 4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준비는 다 된 듯 했다. 식탁 위에 놓인 장미꽃도 제법 분위기가 있었고, 요리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얼음에 재워진 샴페인은 무언가 축하할 일에 쓰여져서 기쁘다는 듯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리스 테일러는 마지막으로 촛불을 켰다. 그는 제 법 고급스러운 크림색의 양복차림을 하고 있었다. 곧 유토피아가 올 것이 다. 오늘이 D데이. 그리스 테일러는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반지가 든 상 자를 다시 한번 만지작거려 보았다. 이제 곧 졸업. 대학에 진학하고 나면 어른이야. 학생 부부란 얼마든지 있는 법이거든. 그리스의 입가에는 감출 수 없는 잔인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날이 밝았다. 쥬엘은 문득 눈을 떠서 시계를 보았다. 정확히 6시였다. 규칙적인 생활을 계속한 몸은 시차도 극복하는가? 한 시간 정도의 시차가 있을 텐데도 정확히 제 시간에 일어난 것이었다. 어젯밤 2시경까지 열심 히 읽어서 <로마의 전성시대>는 이미 제자리에 다시 꽂아둔 상태였다. 이 제 오늘이 내 제삿날이 되는 건가? 그다시 실감이 나질 않는다고 느끼며 쥬엘은 기지개를 켜고 간단한 체조를 하기 시작했다. 몸에 땀이 나기 시 작할 무렵,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루엔 콜리였다. 엊저녁 디노를 만나고 온 이후로 듀렌 테일러와 스파트 피렌은 보이지 않았다. 또 다른 의 멤버를 데리러 갔을 것이다. "벌써 일어났나?" "그래. 원래 죽을 사람들은 몸을 청결하게 하고 단정히 하는 법이라고 들 하잖아. 음, 지금 땀이 많이 났는데 샤워라도 할 수는 없을까?" "좋지. 이쪽으로 와. 어차피 여기는 동굴 안이니까 밖에서 문만 잠그면 밀실이거든. 밀실에서조차 달아날 생각을 하는 바보는 아니겠지?" 미로 입구까지의 안내는 디노가 직접 해 주었다. 쥬엘은 자기보다 약간 작은 키의 앞서가는 디노의 머리 꼭대기를 바라보면서, 새삼 두려움을 느 꼈다. 정신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사악한 전술을 구가해 내는 사람. 과연 미로에서 죽는다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출구가 없는 미로는 미로가 아니야! 설마 출구가 없는 미로를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니겠지. "무슨 생각을 하지?" "별로. 미로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후후. 걱정 말게. 이 미로에는 출구가 있으니까. 출구를 빠져나가는 것이 출구를 찾는 것보다 더 힘들지도 모르지만." 무슨 말일까? 출구가 나 하나 지나가기에도 힘들정도로 작단 말일까? 아니면 무슨 장애물이... 큰 바위돌로 막혀 있다거나 폭이 꽤 넓은 강물 이 흐르고 있다면? 가능성은 있군. 어쨌든, 살아남을 길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만 해도 꽤 자상하신걸. 눈앞에 쇠로 된 문이 나타났다. 동굴 안이 전혀 보이지 않도록 네모 반 듯하게 딱 막힌 문. 동굴을 그 부분만 정확하게 네모나게 깎아놓은 것만 해도 대단한 솜씨이다. "와~~ 대단한 솜씨네요? 이 문 누가 만든 거지요?" 이상하게 두려움이 일기 이전에 감탄부터 났다. 디노가 흠칫 놀라며 돌 아보았다. "과연 피에르가 정성들여 키운 애 답군. 이런 상황에서도 여유가 넘치 는구만. 좋았어, 자네가 이 미로에서 살아남아 출구를 통해 나온다면, 자 네를 살려줄 것을 약속하지. <밀라노-엘바>의 녀석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는 않겠지만 뭐 상관없어. <파파>의 전원이 죽는다 해도 자네는 살아남을 걸세. 나 디노 레콘의 이름을 걸고. 아무래도 이 미로 안에 일단 발을 디 뎌 놓은 다음에는 그다지 쉽지 않은 일일테지만." 미로안에 발을 디뎌놓은 다음에는 쉽지 않은 일? 그렇다면 미로에 들어 서기 전에 --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디노를 때려 눕히고라도 달아나야만 한다고 암시하는 것일까? 쥬엘은 디노의 표정을 살폈다. 전혀 경계하지 않는 표정. 쥬엘은 마음을 돌렸다. 만일 디노가 쥬엘과 한판 붙고 싶어하 고 있다면 그렇게 평온한 상태일리가 없었다. 최소한의 경계는 하고 있어 야 했다. 또한, 확실히 '이 미로에서 살아남아 출구를 통해 나온다면'이 라고 말했었다. 그렇게까지 말한 사람을 비겁하게 등뒤에서 친다면 도리 가 아니다. 파파는 날 그렇게 예의없는 사람으로 가르치지는 않았어. 최 소한 거물을 대할 때에는 예의를 갖추라고 그토록 당부했었지. 디노는 바위를 뚫고 채워진 철창에 걸려있는 커다란 자물쇠에 열쇠를 넣고 돌렸다. 끼이익 소리를 내며 철문이 디노와 쥬엘이 서 있는 쪽을 향 해 열렸다. 기가막힌 이음새였다. 균일하게 2미리 정도의 틈새를 남기고 깎여진 문과 바위사이의 틈새도 그렇거니와 문이 열리는 공간도 절묘했 다. 기가막힌 세공솜씨다. 쥬엘은 그 이음새를 다시한번 감탄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직접 잘라서 만들어 붙인 문이라네. 이만하면 나도 괜찮은 솜씨 지?" 디노가 자랑스럽게 웃었다. 조금도 잔인함이 없는 미소였다. 저런 미소 야 말로 거물만이 갖는 독특한 재산이지. 쥬엘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 스 테일러라면 아무리 사심없이 웃으려고 해도 그 눈에는 잔인함이 어리 는데 말야. 디노가 건내준 한뼘 정도 길이의 양초를 받아들고 한발 안으로 들어서 자 뒤에서 철문이 닫히고 자물쇠 채워지는 소리가 덜커덕 거렸다. 동굴안 은 캄캄했다. 문안에 들어서기 전에 디노를 쓰러뜨리고 달아나는 편이 미 로를 헤쳐 나가느니 보다는 훨씬 간단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고 싶 지는 않았다. 미로의 출구를 찾고 빠져나간다면 살려준다고 보장을 했지 않는가. 그리고, 이 미로의 출구에 무엇이 있는지 정도는 알고서 가야 파 파에게도 보고할 거리가 생긴단 말야. 안 그러면 파파는 날 비웃을 거야. "오 우리의 쥬엘, 드디어 무사히 살아돌아왔군요. 비록 파파의 일원으로 서는 전혀 쓸모가 없지만, 살아돌아와 주어서 감사하나이다." 라고 허리 까지 굽신대면서. 쥬엘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죽기보다 더한 모욕이었다. 쥬엘은 촛불에 불을 붙였다. 미로에는 전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미로의 입구 철문 바로 앞까지 그렇게 촘촘하게 빛나던 백열등도 하나도 없었고, 천정을 조사해 봐도 전선이라곤 없었다. 결국 이 초 한 자루가 다 타버리기 전에 출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인가? 쥬엘은 한숨을 가볍게 폭 쉬고는 조금씩 앞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출발이야." 마리의 방문을 열고 앙트와느가 말했다. 침대에 엎드려서 패션 잡지 <라 모드>를 보고 있던 마리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벌써요?" "벌써라니. 지금쯤 쥬엘은 죽었을 지도 몰라."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말아요. 그렇게 간단한 듯이 얘기하다니. 아 무리 무감정한 라지만 그럴 때는 화가 난다구요." "어쨌든, 다녀올테니까, 전화 확인을 부탁해. 혹시 전파수신기가 비명 을 지르거들랑 케리를 보내도록 하고. 케리한테 휴대용 탐지기가 있으니 까." "알았어요. 이제 책 볼 마음의 여유도 없겠군요. 기도나 하지요, <파리 의 천사>에게. 행운을 빌어요, 앙트와느." "그래, 그럼." 앙트와느는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잠시 그대로 서 있던 마리는 <라 모 드> 지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턱을 괸채 생각에 잠겨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쥬엘은 역한 냄새를 느꼈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냄새였다. 이게 무슨 냄새였더라. 쥬엘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래, 시체가 썩는 냄새였다. 14살때 였던가, 표창과 권총을 훈련하러 사냥터로 갔을 때, 파파는 쥬엘더러 일주일동안에 15마리 이상의 큰동물을 잡아서 제자 리로 돌아오라고 시켰었다. 아열대지방, 맨처음 잡았던 동물들이 썩어갈 때 나던 역한 냄새... 쥬엘은 구토증을 느꼈다. 그리고 냄새가 나는 곳이 어딘지를 찾았다.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시체가 하나. 죽은지 얼 마 안 된 듯 그럭저럭 형태가 남아있는 시체였다.들짐승한테 죽임을 당한 듯 몸둥아리는 다 뜯기고 뼈가 거의 드러나 있었지만, 머리는 그대로 남 아있었다. 전혀 뼈가 드러나지 않고, 누군지조차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시체였지만, 눈이 파여서 썩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이 <미로> 안에는 이렇게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동물이 산다는 이야기인가? 시체의 몸둥아리에 난 이빨자국의 날카로움을 확인하며 쥬엘은 혼자 중얼거렸다. 머리만 남다니, 머리는 별로 맛이 없었던 모양이로군. 쥬엘은 문득 역함 이 넘어와서 고개를 돌리고 구토를 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서 길을 가 기 시작했다. 미로는 정말 넓었다. 그리고 교묘했다. 어떻게 길을 거쳐왔는가를 기억 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했다. 그리고 아직도 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동안 쥬엘은 다섯구의 머리만 남은 시체를 더 발견했다. 그중 두 구는 쥬엘도 알고 있는 의 멤버였다. 아는 사람의 시체를 만난다는 것은 확실히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다지 고운 모습의 시체가 아니라면 특히나. 꽤 친하게 지냈었던 친구인 쥬드의 시체를 확인했을 때에 쥬엘은 처음으로 등에 전율을 느꼈다. 만일 그것이 파파였다면, 피에르 에드윈 P.아담의 시체였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문득 스쳐갔기 때문이었다. 파파 는 안 돼. 절대로. 내가 여기서 죽는 다면, 파파의 멤버들도 무사할리는 없겠지. 파파가 여기까지 잡혀와서 이 동굴안에서 나를 발견하게 된다면 어떨까? 파파 역시 마찬가지 일거야.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파파에게 이 동굴안에서 나를 발견하도록 할 수는 없어. 그것도 머리만 남은 나를. 차라리 내 머리만이라도 다른 사람의 머리와는 달리 맛이 있었으면 좋겠 는데. 그러면 파파가 나를 알아보지 못할 텐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아니지. 출구는 있다고 그랬어. 디노같은 거물은 거짓말 은 하지 않아. 초는 이제 3분의 1도 남지 않았다. 쥬엘은 촛불을 불어 꺼 버리고 그자 리에 앉았다. 지금까지 지나온 길을 되새겨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야만 아직까지 가보지 않은 길을 가기가 쉬우니까. 쥬엘은 자신의 방향감각이 동물적으로 뛰어나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기뻐했다. PART 8. 여름 사건 II 파파와 앙트와느, 케리와 크리스토퍼는 별장에 도착했다. 충분히 정찰 을 한 다음, 이 근처에는 사람 그림자도 없다는 것이 확인되자 접근을 시 도한 것이었다. 굵은 쇠사슬이 달린 커다란 자물쇠 하나가 흉하게 채워져 있을 뿐, 지나치게 조심스럽게 군 것이 창피할 정도로 별다른 방어장치가 없었다. 냉방장치가 된 별장은 시원했다. 지키는 사람도 하나 없이 자물 쇠만 하나 덜렁 달려있는 별장이라니. 파파는 <밀라노-엘바>가 하는 일 치고는 너무 허술하다고 생각했다. 이탈리아 내에서 첫째 둘째를 다투는 그런 대조직이 자기 조직의 재산을 이렇게 집지키는 사람, 식사를 준비하 는 여자 하나도 없이 방치해 두다니. 손쉽게 자물쇠를 따고 들어간 네 사람은 일단 별장안을 뒤졌다. 그다지 눈에 띌 만한 것은 없었지만, 파파는 쥬엘이 있었다는 흔적을 두 개 발견 했다. 하나는 커다란 책장에 꽂혀 있는 샐러드용 포오크였다. "이건 쥬엘의 솜씨야. 앉아서 힘으로 샐러드용 포크를 여기까지 던져서 이렇게 멋지게 꽂을 수 있는 사람은 쥬엘뿐이라고 확신하네." "어떻게 <앉아서>라고 확신하지요?" 크리스토퍼가 머리를 갸웃하며 물었다. "눈이 있으면 알 수 있지. 이 각도를 보라구. 서서 던진 각도는 아니지 않는가. 물론 솜씨가 있으니까 각도가 크게 휘어있지는 않지만." "포오크를 표창처럼 쓸 수 있는 사람은 많아, 피에르. 너무 기대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내기라도 하겠어. 저건 쥬엘의 솜씨라구. 분명히 이 책장에 누군가가 이렇게 기대어 서 있었던 거야. 그래서 쥬엘이 겁을 주느라 귀옆에 꽂히 게 던진 거지." "탐정해도 되겠군. 추리력이 희한한데." "이 각도를 보면 쥬엘은 저 소파에 앉아 있었던 게 틀림없어. 아마 저 기서 식사도 했겠지." 파파는 그 소파로 가서 앉았다. 잠시 앉아서 방안을 둘러 보다가 비로 소 책장에 눈이 가 닿았다. 파파는 책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두 번째 흔적을 발겼했다. 즉, 책 위를 주욱 지나가던 시선이 <로마의 전성 시대> 위에서 멈춘 것이다. 거꾸로, 그리고 약간 튀어나와 있는 책. 표지 아랫쪽의 거슬리게 그어진 손톱자국이 확신을 주었다. 파파는 그 책을 뽑 아들고 제일 뒷면을 펼쳤다. 쥬엘이 급하게 써 놓은 속기문자가 눈에 들 어왔다. "쥬엘의 메세지를 찾았어. 루엔 콜리라는 사람과, 그리스 테일러의 형 인 듀렌 테일러, 그리고 스파트 피렌과 함께 있었다고 하는군. 젠장, 이 거야 원. 듀렌 테일러까지는 이해를 하겠어. 그리스에 대한 조사를 할 때 에 <밀라노-엘바> 단원이란 것까지는 조사가 되었으니까. 그리스와 이 조 직과의 연관성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하지만, 스파트 피렌은 또 뭐야. 안 토니오 피렌이 정말 이들에게 그토록 깊숙히 관련되어 있다는 말인가? 자 기 조카까지 동원할 정도로?" 잠시 아무도 말이 없었다. 그때였다. 바깥에서 차소리가 나더니 두런두 런 하는 말 소리가 들렸다. '자물쇠가 왜 열려있지?'라는 말은 모두의 귀 에 뚜렷이 들려왔다. 쥬엘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총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 후회될 지경 이었다. 이런 동굴안에서 총을 쏜다는 것은 위험천만이라는 것은 알고 있 지만, 이 망할놈의 동물은 무기없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호신용 단검을 사용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조금전에 마침내 아물거리던 촛불 마저 꺼져버렸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유리한 것은 확실히 사람보다는 야생동물일 것이었다. 쥬엘은 숨을 낮고 고르게 내쉬려고 노력했다. 그리 고 모든 감각을 청각에 최대한 기울이고 있었다. 오른쪽 무릎 아래쪽에서 꽤 많은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아픔을 느낄만큼 한가하지가 않았다. 야 생동물의 야릇한 냄새와 피비린내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 와 함께 자물쇠로 잠겨있는 철문의 위치가 쥬엘의 뇌를 온통 차지하고 있 었다. 가능할 거야, 물론. 이 녀석처럼 재빠르진 않아도 난 꽤 여러가지 동물과 싸워봤었잖아. 쥬엘은 문득 정신이 들었다. 눈앞에 아른거리던 노인의 얼굴이 차츰 선 명해져 왔다. "정신이 드나?" "예. 여기는 어디지요, 디노?" "동굴안은 아니니까 안심하게. 자네는 살아서 동굴을 나왔으니까, 이제 목숨은 보장해 주기로 하지. 다른 데에서 죽는 거야 할 수 없지만, 최소 한 <밀라노-엘바>로부터 살해당하지는 않을 거야." 쥬엘의 얼굴에는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미소가 떠올랐다. 뭔가 뿌듯 했다. "그럼 가봐야 겠어요. 파파가 기다릴테니까. 디노도 돌아가셔야지요? 바래다 드릴까요?" 쥬엘은 몸을 일으키려했으나 다리에 지독한 통증을 느끼며 쓰러져 버렸 다. 오른쪽 무릎 아래쪽이 불이 붙는 것 같았다. "가만이 있게. 지금은 소독만 해 놓았을 뿐이니까. 실바늘 가진 게 있 으면 내가 서툰 솜씨나마 꿰매주겠지만. 살이 꽤 많이 벌어졌어. 자네는 여자니까 실 바늘 정도는 가지고 다닐지도 모르겠군. 있으면 내놔보게." 쥬엘은 상을 약간 찡그리며 양복 안쪽에서 가느다란 외과용 실과 바늘 을 꺼냈다. 응급조치 상비약은 모조리 -- 물론 무게가 많이 나가는 것이 라든가 부피가 큰 것들은 가볍고 작게 축소시켜서 -- 가지고 다니고 있었 다. "훌륭하군. 다치려고 맘 먹은 사람같은 걸." 디노는 휘파람이라도 불 것처럼 말했다. "이것으로서 두 사람째군. 내 애완동물한테서 살아나간 사람이. 더 이 상은 살아나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없게 되었지만. 내 애완동물은 죽어버 렸다네. 가엾은 클로타. 자네의 칼은 정확하게 급소를 찔렀어. 외과용 실 바늘도 필요없을 정도로 단번에 죽어버렸지." 디노의 얼굴은 음울해 보였다. 좀 어두워보이기는 했지만 그다지 슬프 게 느껴지지는 않았다는 것 또한 신기한 일이었다.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상황에 언제나 적절히 대처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쥬엘은 바늘을 잡으려는 노인의 손을 가만이 밀쳐내고 스스로 바늘에 실을 꿰었다. 그리고는 상처를 살폈다. 정말 끔찍하리만치 갈라져 있었 다. 이런 산중에서, 기껏 열심히 바느질 해 놓아봤자, 내려가는 동안에 도로 상처가 터지고 말텐데... 그래도 일단은 꿰매 놓고, 쥬엘은 상처를 단단히 감았다. 어떻게든 견뎌 주겠지. 산을 내려가기만 하면, 파파가 어 떻게든 알아서 해 줄 거야. "디노, 또 한 사람은 누구였어요? 그 끔찍한 동굴을 살아내려간 사람 은?" "궁금한가? 그 사람도 클로타를 쓰러뜨렸지. 그 사람은 무기를 안 가지 고 있었어. 과일칼 하나도 없었지. 그런데도 클로타가 쓰러진 건 -- 지쳐 서 쓰러졌다네. 자그마치 6시간을 싸웠으니까 그럴 법도 하지. 우리 클로 타가 지쳐서 쓰러졌는데도 그 사람은 문을 열고 나왔단 말야. 그래서 산 을 내려가도록 했지. 물론 비밀 보장은 받았지. <밀라노 - 엘바>의 일급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죽이려고 나에게 데려온 것이었거든. 살려주겠다고 하니까 모두들 난리법석을 부렸지만, 난 그 사람을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알렉스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본명은 크리스토퍼 프린스, 영국인으로, 꽤 이름있는 정치가의 아들이지. 아버지가 재혼할 때 가출해서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다가 우연히 의 부탁을 받고 조사를 하다가 잘못해서 걸린 모양이었어. 지금이라도 그 사 람이 알고 있던 비밀만 퍼뜨린다면 <밀라노-엘바>는 전멸이야. 후후. <밀 라노-엘바>와 바꾸다니, 그 사람 목숨은 꽤 비싼 편인거지." 파파와 케리는 별장 뒤쪽의 바위산 기슭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크리 스토퍼가 붙잡히고 만 것이다. 앙트와느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딘가에 숨 어있다가 곧 나 여깃네 하고 나타나리라 믿어졌다. 사실 어떻게 보면 작 전상 그렇게 만드려고 했던 것이 보다 쉽게 이루어진 것이기도 했다. 지 금은 의 차림새 -- 검은 양복에 곤색 넥타이, 그리고 은으로 된 수 공예품 넥타이핀까지 완벽하게 -- 로 가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크 리스토퍼는 명단에 없으니까, 결국 어디를 붙잡혀 가건 간에 빠져 나올 수 있는 소지는 남들보다 더 있는 것이다. 얼마나 버티어 줄 지는 모르지 만, 쥬엘이 살아있다면 쥬엘을 만나게 될 가능성도 높다. 파파 자신이 가 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결국 크리스토퍼에게 역할을 넘기는 것에 동조하기로 한 것은 그러한 안전성 때문이었다. 그는 쥬엘을 만날 때까지는 스스로 빠져나오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리고, 쥬엘과 함께라면 기꺼이 떠나올 것이었다. 를 위해서. 적어 도 안토니오 피렌이라는 거물의 회사를 넘겨받기 위해서라면 쥬엘이 꼭 필요했으니까. 쥬엘은 디노와 헤어진 후 도저히 그대로는 더 걸을 수 없다는 것을 느 꼈다. 그러다가 근처에 조그마한 동굴이 보이자 아무런 생각없이 그 안으 로 들어가서 상처에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붕대를 다 감고 나자 벽에 기 대 앉아 디노와 나눴던 대화를 되새겨 보았다. -- 그래, 그 이후로 아버지는 만나보았나, 쥬엘? 내 기억에는 사이먼의 귀여운 외동딸은 실버 블론드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 사이먼? 실버 블론드? -- 머리색 말이야. 눈색깔은 바꾸지 않은 것 같군. 머리칼은 염색을 했 을 테고. -- 무슨 말씀이신지, 잘... 사이먼이 누군가요? -- 정말 모르나? 호오... 이거 교육이 아주 잘 된 친구로군. 하긴 피에 르는 교육적인 면에서는 능력이 뛰어나니까. -- 저도 궁금한게 산더미 처럼 많지만 예의상 묻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하는데요, 디노. -- 예의상이라니. 우리가 예의같은 거 생각하면서 자란 인간들이던가? 무엇이든지 물어보라구. -- 동굴 안에서 당신이 만들고 있는 것은 대체 무슨 기계지요? 꽤 크 고... 계속 부품이 날라져 오는 모양이던데... -- 유감스럽지만 그건 알려 줄 수가 없군. 그걸 알게 된다면 아무리 자 네라 할지라도 내손으로 자네 목숨을 빼앗지 않으면 안 되거든. 거 기에 관해서는 내 재량권 밖이니까. -- 뭐,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좋아요. 전 제가 알아본 바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 뿐이니까요. 그 정도도 눈치 못챌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 거든요. 동굴안에서 24시간도 넘게 있으면서 그 정도도 알아내지 못 했다면 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 얼마나 잤는지 몰랐다. 피를 많이 흘린 탓인지, 완전히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흔드는 바람에 눈을 떴다. 잠시 눈앞이 몽롱했지만, 의 복장이 눈에 들어오자 곧 편안한 기분이 되었다. "다니엘이예요? 아니면 케리? 누구지요? 여길 어떻게 알고..." 몸을 일으키려하자 오른쪽 다리에 무서운 통증이 가해져왔다. "그저, 지나가던 길에. 그런데 맘편하게 자고 있다니, 걱정해 주던 사 람들 보기에 미안하지도 않나?"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그래요. 이젠 괜찮아요. 상처도 단단히 처맸으 니까. 그런데 코우치가 여기 왠일이예요?" 쥬엘은 그 사람이 크리스토퍼라는 걸 알자 괜히 가슴이 조금 뛰는 것을 느꼈다. 쥬엘은 은근히 자신이 그걸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속이고 싶었 다. 왠지 모르지만, 영국에 있을 때부터, 코우치에게는 자꾸만 의지하고 싶어지곤 했던 것이다. 그때문에 처음부터 경계를 했고, 나중에 친해졌을 때도 최소한의 무관심을 가장하곤 했었다. "<쥬엘의 휴가, 프랑스의 알프스, 여름에는 산이 최고라구요.>라면서?" 코우치가 얘기를 하며 씨익 웃었다. 쥬엘은 쑥스러운 미소를 띤 채 그로부터 고개를 돌려 동굴 바깥쪽을 바 라봤다. 해가 지려하고 있었다. 산에서 보는 노을이 눈부시게 하고 있었 다. "정말 아름답군요." "그러게. 프랑스는 아름다운 나라야." 쥬엘은 이제는 다리의 아픔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한없이 마 음이 편해져 왔다. "그런데, 코우치, 무슨 자격으로 여기 왔지요? 그런 옷차림새 하며... 당신도 인가요?" 쥬엘은 열심히 기억을 더듬었지만, 쥬엘이 알고 있는 한도내에서는 의 멤버중에 크리스토퍼와 같은 인물은 없었다. "꼭 그렇지는 않아. 난 임시멤버라나 뭐 그렇다더군. 필요할 때만 갖다 쓴다나." "아, 그래요? 그렇다면 안심이군요. 임시멤버라면, 최소한의 능력은 있 다는 소리니까. 그렇지 않아도 이대로 내려간다는 게 기분이 꺼림직했는 데 잘 됐어요. 디노의 동굴에 가서 몇가지 알아와야 할 게 있는데, 지금 의 나는 힘들겠지만, 코우치라면 할 수 있겠지요?" "무엇을 알아와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벌써 거기엘 다녀왔는 걸." "벌써 다녀왔다고요?" "그래. 네가 여기 어디쯤의 동굴에 있을 거라는 것도 디노가 알려준 거 야." "그런데도 그렇게 말짱한 거예요? 상처 하나도 없이?" "내가 상처가 없어서 불만인가?" 크리스토퍼가 씨익 웃자, 쥬엘은 왠지 볼이 붉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스스로 그것을 의식하자 말투가 차갑게 변해져 나왔다. "말해 봐요, 코우치. <밀라노-엘바>가 쩔쩔 맬만한 비밀이라는 게 뭐지 요? 당신이 3년쯤 전에 디노의 <애완동물>에게서 살아나간 맨 처음 사람 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요. 그때 당신 목숨과 바꾼 정보가 무엇이었나요?" "나에게 강요하지마라, 쥬엘. 나로서는 그것만은 말할 수가 없어. 내 목숨을 담보로 하고 받은 거니까. 그건 그렇고, 자, 마음에 들 만한걸 보 여줄까? 디노의 동굴에서 가져온 건데..." 쥬엘은 크리스토퍼가 내미는 두장의 서류를 들여다 보았다. <밀라노-엘 바>의 손에 넘어갔다던 명단이 깨끗하게 타이프라이터로 쳐져 있었다. 동굴 안에서 만났던 시체들의 이름은 다 검은 줄로 박박 지워져 있었 다. 잘 보면 가까스로 밑의 글자가 보이는 정도였다. 쥬엘의 이름은 지워 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파파의 이름도. 쥬엘의 눈은 무의식중에 사이 먼 윌콕스를 찾고 있었다. 그 이름도 있었다. 삭제되지 않은 채로. 쥬엘 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어디서 가져왔지요? 사본인가요?" "아니. 이게 원본이야. 사본은 없는 것 같던데. 누가 어디로 이동했는 지, 그러니까 어디서 납치해야 하는지, 하는 등의 모든 지령은 디노가 알 아서 내리는 모양이었어. 이걸 가져와 버렸으니 지금쯤 열받고 있겠지." "어쨌든 일이 급하게 됐군요. 어서 내려가야겠어요." 쥬엘은 일어서려 하다가 비틀거렸다. 크리스토퍼가 쥬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쥬엘은 무의식중에 그를 뿌리쳤다가 통증을 느끼며 다시 그의 팔 을 붙들었다. 크리스토퍼의 눈이 쥬엘을 주시하고 있었다. 쥬엘은 한동안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리스토퍼는 쥬엘의 약간 벌어져 있는 입술 에 살짝 키스하고는 어깨를 내밀었다. "자, 여기 기대야 빨리 내려갈 수 있다구." "여보세요." 마리는 포크로 찍어든 사과를 한입 베어물다 말고 수화기를 들었다. 그 다지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파파 일행이 떠난 뒤로 벌써 서너차례 전화 가 왔었지만, 그저 단지 의 멤버들끼리의 연락을 위한 전화였을 뿐 이니까. "여보세요? 쥬엘 실버 오스몬드 입니다. 피에르 에드윈 P.아담을 부탁 합니다." "쥬엘? 오, 정말 쥬엘이예요? 나예요, 마리. 거긴 어디죠? 무사한 건가 요?" "아, 마리예요? 유령은 아니예요. 목소리를 들으니 반갑군요. 그보다 도, 파파는 어디있지요? 피에르 말이예요." "당신을 찾으러 갔지요. 당신이 갇혀 있었다던 별장의 주소로 찾아간 거예요. 지금 네사람이 거기에 가 있어요." "그건 알고 있어요. 그럼 아직껏 돌아오지 않았다는 건가요? 어딜 갔 담. 시간이 별로 없는데. 그 밖에 핵심멤버는 지금 거기엔 아무도 없지 요?" "물론이예요.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으니까. 제일 가까이 있는 핵심멤 버가 이집트에 가 있는 블라디미르일거예요." "블라디미르는 싫어. 그 사람은 너무 고리타분해요. 그밖에 쓸만한 대 원은 없어요?" "아직까지는요. 알랭이랑 브라이언이 지금 독일에서부터 이리로 오고 있다고 하더군요. 비행기 안에 있다고 들었어요. 날더러 연락을 받아놓으 라고 했으니까요." "음. 알랭은 잘 모르겠지만 브라이언이면 쓸만하지. 후, 이렇게 일이 말려버리다니. 아니요, 찾아올 필요 없어요. 내가 택시를 타고 가겠어요. 다만, 파파에게서 연락이 있으면, 전해 줘요. 난 이제 멀쩡하니까, 날 찾 지 말고, 안토니오의 주변을 살피라고요. 안토니오가 위험해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안토니오 피렌이 위험하다고요? 좀 더 자세히 알려 줄 수는 없나요?" "파파에게가 아니면 말할 수 없어요." 쥬엘은 마리와의 전화를 끊고서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 든 일단 연락은 된거니까. "수고했어, 쥬엘. 피에르는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대?" 공중전화 박스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크리스토퍼가 다가왔다. 쥬엘은 멍하니 그의 입술을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볼이 붉어졌다. 그러지 않 으려 하는데도 저절로 시선은 그의 입술로 향하고 마는 것이다. 가슴이 뛰는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도 놀랄정도로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런데도 다만... 시선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택시를 타고 파파의 집으로 가야겠어요. 여기서 택시를 부르려면..." "좀 쉬지 그래. 내가 할 테니까." 전화번호부를 뒤져 콜택시 회사의 넘버를 찾는 크리스토퍼의 입술을 쥬 엘은 멍하니 바라다보고 있었다. 쥬엘은 아침 햇볕에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여섯 시. 해는 제법 높이 까지 떠 올라 있었고, 얇은 커텐을 뚫고 쥬엘의 눈을 부시게 하고 있었 다. 쥬엘은 일어나서 츄리닝을 걸친 다음,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열었다. 세 수를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정원으로 내려섰다. 그리고 파파의 집에서 아침을 맞을 때마다 그랬듯이 조깅을 하려 하다가 오른쪽 다리에 통증을 느끼고서야 체념한 듯 그냥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방으로 돌아가 검은 양복을 갈아입고 나자, 식당으로 갔다. 언제나 그 랬던 것처럼, 그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파파가 한가운데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굳모닝, 파파."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쥬엘." "응... 아주 잘 잤어." 쥬엘은 자리에 앉을 생각 없이 곧장 파파에게로 다가갔다. 거의 얼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와지자, 파파는 신문을 내려놓고 쥬엘 을 마주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쥬엘?" 파파의 목소리는 정겨웠다. 쥬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파파의 목에 매달려 버렸다. "파파, 파파, 파파..." 쥬엘은 파파의 가슴에 얼굴을 부벼대며 수없이 파파의 이름을 불러댔 다. "자자, 진정하십시요, 쥬엘. 이제 괜찮으니까.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파파가 쥬엘을 한번 꽉 껴안았다가 살며시 밀어냈다. 쥬엘은 곧 똑바로 서서 파파를 보며 빙긋이 웃을 수 있었다. "응. 그래, 이제 괜찮은 거지, 뭐.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조깅을 할 수 가 없었어. <산책>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구." "아, 다리를 다쳤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어디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닥터 프란시스가 와서 치료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응. 거의 말짱해. 일주일이면 말짱해 질 거라고 했어. 흉터는 좀 남겠 지만." "또 성형수술을 해야겠군요. 네번짼가요? 전에 수술한 곳들은 전혀 표 시가 없지요?" "물론.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찾아봐도 못 찾을 정도지. 난 성형수술하 기는 정말 싫지만..." "당신은 우리측 유일의 여자라는 것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요?" "알아. 항상 파파의 말을 명심하고 있다니깐. 항상 그래왔잖아." 쥬엘의 말투에는 여태까지에는 없었던 신경질이 약간은 묻어있는 듯이 느껴져서 파파는 흠칫 놀랐다. 쥬엘의 얼굴 표정도 그리 밝지 못했다. 언 제나처럼 웃기도 하고 장난하기도 하면서 수술이건 훈련이건 말짱히 해내 던 쥬엘과는 좀 달랐다. 파파는 문득 전율을 느꼈다. '내가 모르는 쥬엘의 모습이 있었다니. 지금 쥬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감도 잡히지 않는다. 디노의 동굴안에서 디노를 만나고 죽을 고 비를 넘긴다는 것이 쥬엘을 이렇게까지 변화시킬 수 있었단 말인가? 아무 리 혹독한 훈련에도 까딱도 하지 않던 쥬엘인데...' "아참, 파파, 안토니오의 주위 경계는 철저히 해 두었겠지?" "물론이지요. 그런데, 그 이유는 뭡니까? 가뜩이나 경호원이 많은 사람 인데, 우리들까지 지켜줄 필요가 있을까요?" "응. 그걸 보고하고 싶어서 파파가 무척이나 보고싶었었어." 쥬엘은 다시 예전처럼 파파에게만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 얼굴로 돌아 가 있었다. 파파는 비로소 마음을 놓고 느긋하게 쥬엘을 바라보았다. "<밀라노-엘바>는 안토니오의 피렌의 수하조직이나 마찬가지였어. <밀 라노-엘바>뿐만 아니라 디노 레콘도." "디노도요?" "응. 바로 그거야. 그런데, 우스운 건, 디노는 안토니오 피렌보다 유토 피아를 훨씬 더 좋아한다는 거야. 그리고, 안토니오가 죽게 되면 좋겠다 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해. 그러니까 뭐랄까, 황제폐하가 돌아 가시면 자기가 모시는 공주님이 여왕이 될테니까, 그걸 바라는 신하의 기 쁨이라고나 할까." "그럼 우리에겐 좋은 일이로군요." "그렇지도 않아. 디노는 무서운 사람이야. 동굴안에서 무슨 기계를 만 들고 있었어. 내가 조사한 바로는 지정한 곳까지 자동적으로 옮겨져서 폭 파되는 것 같은데, 그런 간단한 것이면 그냥 사람이 시한폭탄을 장치해도 될 거란 말야. 자세한 것은 더 내막을 알아봐야 하겠지만, 시간이 없었 어." "그래서 경호를 철저히 하라고 한 것인가요?" "응, 그런데, 파파, 그 로보트가 뭘 하는 건지는 우리 코우치가 잘 알 고 있어. 크리스토퍼 프린스 말야. 그 사람은 말하려 하지 않지만." 파파는 쥬엘의 말투가 갑자기 신경질적이 된 것을 느끼고 쥬엘을 빤히 쳐다보았다. 파파를 바라보고 있는 쥬엘의 눈은 파파가 아직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알 수 없는> 눈이었다. 쥬엘은 앨런 사모아 고등학교 테니스부의 합숙소에 도착한 것은 오후 2 시경이었다. 닥터 프란시스에게서 성형 수술 후 최종 점검을 받고 합격하 자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커다란 코트에서 다들 연습을 하고 있었다. 벌써 테니스 라켓을 쥐어본 지가 거의 한달이 된 것을 깨닫고는 쥬엘은 새삼 놀랬다. "와아, 쥬엘. 어서 와." 캐더린이 쥬엘을 알아보고는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야아, 캐디, 잘 있었니?" "응, 쥬엘 너 못 본 새에 머리가 많이 길었네. 좀 잘라야겠는데?" 캐더린의 환한 미소가 쥬엘의 마음에 커다란 물결을 이루며 번져갔다. "어머, 쥬엘 아냐?" "정말, 소식도 없이 사라지더니만."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다가온 것은 낸시와 유토피 아, 그리고 그리스 테일러 뿐이었다. "아, 다들 잘 있었어요?" 쥬엘은 환히 웃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들었다. "물론이야. 네 편지도 잘 받았고." 유토피아의 눈부신 미소가 다가왔다. 책을 돌려줄 때 짤막한 편지나마 써 놓기를 잘 한 것이다. 그리스 테일러의 눈매가 매섭게 느껴졌지만, 쥬 엘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리스 테일러와 <밀라노-엘바>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이 드러난 만큼,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존재였 다.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지금은 연습시간이야!" 낯익은 목소리에 쥬엘은 멈칫했다. 크리스토퍼 프린스가 이쪽을 보며 테니스 라켓의 줄을 새로 매고 있었다. 온화했던 기분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긴장을 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났다. 몰려들었던 몇명의 사람들 마저 다 흩어져버렸다. 쥬엘은 주전자에 물 을 담아 나르고 있던 1학년 학생에게 자기가 있을 방을 묻고는 짐을 풀었 다. 오랜만에 잡아보는 테니스 라켓은 조금은 어색하기도 했고, 정겹기도 했다. 1학년들이 서둘러 비켜주는 코트에 섰다. 지구대표 선수로 전국대 회에 나가느니 만큼 특별대우인 것이다. 공도 한 무더기 모아다 주었다. 쥬엘은 서브를 날려 보았다. 폴트는 나지 않았지만 코스가 영 어색했다. 몇번을 반복하니까 비로소 조금은 감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한참이나 서브를 날렸는데도 아무도 리시이브를 해 주려 하지 않았다. 한 달이나 연습을 빼먹었다고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건가. 쥬엘은 또 짜 증을 내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흠칫 놀랐다. "누가 좀 받아줘요!" 쥬엘은 악을 쓰듯 외쳐버렸다. 잠시 부원들의 시선이 쥬엘에게 멈췄다 가 다시 흩어져갔다. "그거 좋지." 맞은 편 코트에 와서 선 것은 그리스 테일러 -- 미스터 유토피아였다. 쥬엘은 공을 날렸다. 확실히 미스터 유토피아라 불릴 만큼 화려한 플레 이... 그리고 공이 강하고 빨랐다. 쥬엘은 어딘가 잘못 돼도 크게 잘못됐 다고 생각을 했다. 공이 맞아주지를 않았다. 아무리 남자의 공이라지만 이렇게까지 안 맞을리가 없어. 아직껏 남자라고 해서 못 당하게끔 연약한 마음을 먹은 적은 없어. 쥬엘은 필사적이었다. 그립마저도 어딘가 잘못되 어있는 것 같았다. 받아친 공이 쥬엘의 라켓을 밀고 날아가 버리기도 했 다. 라켓을 놓친 오른 손을 한동안 붙들고 있어야 할 정도로 강한 공이었 다. 코트 곁 벤치에선 코우치가 팔장을 끼고 능글능글하게 웃으면서 서 있었다. "재미있어 보이는데 나도 끼워 줘." 갑자기 유토피아가 그리스에게 합류했다. 그러자 연습하던 부원들이 하 나 둘씩 이쪽 코우트로 몰려와 구경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랬었다. 유 토피아의 플레이는 화려하고 멋있어서 지나가던 학생들도 멈춰서서 넋을 잃고 구경하곤 했었다. 두 사람에게서 두어시간 혹사를 당하고 나자 비로소 쥬엘은 자신의 감 각이 돌아온 것을 느끼고 빙긋 웃었다. 몸은 완전히 늘어져버렸지만, 이 젠 한달 전 보다도 공이 어디로 온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져 왔다. 확실히 유토피아와 그리스는 좋은 테니스선수였지만, 이젠 쥬엘은 경기를 한다고 해도 쉽게 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방으로 돌아가려 하자, 누군가가 코우치가 부른다는 말을 전해왔다. 쥬엘은 간단히 옷을 갈아입고 코우치의 방으로 갔다. "그래, 다리는 어때?" "말짱해요. 덕택에." 쥬엘은 의식적으로 시선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코 우치를 보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그 입술로 시선이 향해져 버리는 것이다. "무슈 피에르에게서 얘기 듣기로는, 전국 대회 우승을 해야한다면서? 다른 얘기는 전혀 안 해주더구만." "그래요. 어쨌든, 전국 대회 우승만 하게 해 주시면 돼요. 마리도 그때 문에 석달간이나 고생을 했으니까." 쥬엘은 코우치의 입술을 바라다보며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대답을 했다. 코우치가 빙긋이 웃었다. "왜, 탐나나?" 쥬엘의 머리는 한순간에 혼란해져 버렸다. <뭐가 말예요?>라고 무신경 한 듯 대답을 했지만,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줄까?" 코우치가 싱긋 웃으며 쥬엘을 잡아 당겼다. 지난번처럼 가벼운 키스가 아니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잠시 뒤 가까스로 몸을 빼낸 쥬엘은 심호흡을 해서 호흡수를 조절하며 코우치를 노려보았다. "전국 대회는 이제 두달밖에 남지 않았어요." "두달 밖에라니, 두달은 길어. 여름인걸 뭐. 코트에는 하루에 16시간이 상씩 햇빛이 쪼인다구." PART 9. 친구들 "쥬엘, 그동안 어디서 지냈니?" 침대에 기어들었을 때 조심스레 다가온 캐디의 물음이었다. 낸시는 부 원이 아니라서 다른 방에서 자고 있었다. "그냥, 여기 저기 떠돌아 다녔지, 뭐. 갑자기 친척 아저씨가 부르셔서 갔다가..." 쥬엘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멍하니 천장을 쳐다본 채 뒷말을 흐렸다. 캐디는 이럴 때의 쥬엘은 아무리 물어봤자 더이상 얘기하지 않는다는 것 을 알고 화제를 돌렸다. "후후, 율리아 선생님도 따라오신 거 알고 있어?" "율리아 선생님이?" 쥬엘은 그제서야 시선을 돌려 캐디를 바라보았다. 캐디의 호기심 많은 눈빛이 가까이에 있었다. "그래, 율리아 선생님이 말야. 여자 부원들을 돌봐줘야 하기 때문에 따 라오신 거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코우치를 따라 온 것 같아. 왜 방학 하기 전에 그런 소문이 꽤 나돌았었잖아. 코우치랑 율리아 선생님이랑 <한접시 더>에서 꽤나 오붓하게 식사하는 걸 본 사람들이 소문을 굉장히 퍼뜨렸었어." "그...래?" 쥬엘은 무관심한 듯이 하품을 하며 눈을 반쯤 감았다. "아, 미안해, 쥬엘. 모처럼 돌아와서 피곤할 텐데. 그동안 고생 많이 한 모양인데, 내가 수다를 떨어서... 어쨌든, 그럼 내일 보자, 쥬엘. 잘 자." "그래, 굳 나잇 캐디." 쥬엘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잠이 온다거나 피곤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제 두 달 남은 기간이 좀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아예 합숙에 참 여하지 않고 마리로부터 특훈을 받는 편이 전국대회 우승을 노리기에는 훨씬 나을 것이었다. 그러나, 안토니오 피렌의 주위에 어두운 기운이 감 돌고 있는 이상 유토피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불 안했다. '내일부터는 그리스에 대해서 좀 알아보기 시작해야겠군. 오늘 보니까, 나에 대한 적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유토피아에 관한 걸 조금쯤 들킨 거나 아닐런지. 정말 그리스는 독자적으로 유토피아에게 접근한 걸까? 그 렇다면 천만다행인데 말야.' 쥬엘의 감은 눈 안에서는 온갖 생각이 꿈틀 거리고 있었다. "쥬엘 말이야, 좀 이상한 녀석 아닌가?" "왜 그래, 그리스? 쥬엘은... 분명히 좀 건방진 데가 있긴 하지만, 괜 찮은 애야. 똑똑하기도 하고. 그동안 아무말 없었잖아. 갑자기 왜 그래?" "네가 걱정이 돼서 그러는 거야, 유토피아. 그러지 않을 수가 없잖아. 갑자기 증발되었다가 또 별안간 나타나서 합숙에 참여하고... 그런데도 코우치는 말 한마디 나무라는 법이 없으니, 그것도 기분나쁘고." "돌아온 날 샤워 끝내고 코우치가 자기 방으로 잠깐 불렀었어." "훈련중에 이탈한 시범 케이스로 혼줄을 냈어야 하는 건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리스? 그렇게 잔인한 말을 하다니." "난 앨런 사모아 고등학교 테니스부 주장이야, 유토피아. 책임이라는 게 있다구. 이번 일로 부원들의 무단 이탈이라도 일어나기 시작해 봐. 힘 든 일은 모조리 내게 돌아오게 되어 있다구. 시범적으로 나라도 기합을 좀 주어야 겠어. 코우치가 외출하는 시간을 빌어서 말야." 유토피아는 그 그리스의 옆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들릴 듯 말듯하게 말했다. "그리스, 난 가끔씩 네가 무서워." 그리스의 핏발 선 눈이 흘깃 유토피아를 보더니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눈으로 변해 버렸다. "걱정 마, 유토피아. 운동선수들이란 늘 기합을 받고 살잖아. 쥬엘도 잘 참아 줄 거야. 근성이 있는 녀석이니까." "낸시, 쥬엘 못 봤니?" "응? 전혀. 어제부터 못봤는데? 왜 그래, 캐디?" "사무실로 전화가 왔는데, 쥬엘이 안 보여서 그래. 급한 전화라던 데..." "그래? 음, 유토피아에게 가 보면 혹시 알지 모르지. 요즘 계속 유토피 아와 이야기를 많이 하던 것 같던데." "벌써 다녀오는 길이야." "그런데 캐디, 너 안색이 안 좋다. 어디 아픈 거 아니니?" "아니, 별로. 좀 더운 모양이야. 우리 수영하러 갈까?" "와아, 그거 좋은 생각이다! 금방 준비 할께." "그래, 그럼 난 사무실에 다녀올께. 쥬엘을 찾을 수가 없다고." 웃으며 낸시의 방문을 닫은 캐디는, 사무실로 향하면서 그다지 기분이 좋지를 않았다. 항상 일주일에 두번씩 꼬박꼬박 사라지곤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밤 늦게야 돌아와서는 지친 듯이 쓰러져 잔다. 어디서 무엇을 하 고 오는 것일까? 밤에 자면서 헛소리를 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다. 불어 이니 스페인어인지 러시아어인지 모를 이상한 나라의 소리였지만, 하여간 몹시 괴로운 꿈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주 작은 소리여서 그때 쥬 엘과 수다떨러 몰래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더라면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지만. 합숙도 이제 3일 남기고 있었다. 그동안 모든 것은 완벽하고 얌전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일주일에 두번씩 파파의 집에 가서 마리에게 특훈을 받 은 덕분에 기술적인 면에서도 엄청난 진보가 있었을 뿐더러, 좀 껄끄럽기 는 하지만 그리스와도 그다지 부자연스럽지 않게 이야기 할 수 있었고, 유토피아와는 또다시 자매처럼 친해졌다. 다시 그 전화가 온 것은 연습을 마치고 모두들 샤워중일 때였다. 여느때처럼 순식간에 샤워를 마치고 제 일먼저 샤워실을 나온 쥬엘에게 전화가 왔다고 알린 것은 율리아 선생님 이었다. 급한 전화라고 했다. 쥬엘의 머리속에서 경계신호가 울리고 있었다. 전에 왔던 그 전화, 급 한 전화라는... 파파라고 생각해 버린 다면 마음이 편할 수 있겠지만, 지 난번에 전화가 왔다고 했던 그 때에 쥬엘은 파파의 집에서 마리에게 특훈 을 받고 있었다. 의 멤버는 일단 파파의 집에 있는가부터 검토된 후 다른 곳으로 연락이 가는 것이 상례이므로, 도저히 파파였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보세요." 쥬엘은 사무적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헤이, 쥬엘이신가? 쥬엘 실버 오스몬드양?" "그렇습니다만, 누구신가요?" "이탈리아인이지. 그다지 점잖지는 않은." 귀에 익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또한 말투도 아주 낯설었다. 발음은 영 어도 아니고 이탈리아어도 아닌 어중간한 발음이라서 듣기가 아주 불편했 다. 차라리 아예 이탈리아어로 말해 준다면 좋을텐데. "전에 절 만났던 적이 있던가요? 미스터 이탈리안?" "아니, 전혀. 자네 목소리를 듣는 것도 처음이야. 다만, 자네를 무척이 나 닮은 한 점잖은 신사분은 너무도 잘 알고 있지. 그 신사에 대해선 자 네도 들어본 적이 있을 거야. 사이먼 윌콕스라는 이름이지." "사이먼... 윌콕스? 잘 기억나지 않는데요." 쥬엘은 아주 태연했다. 정말로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 다. 전혀,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정말로 내가 그런 사람을 알고 있었을 까? "기억나도록 도와줄테니 잠시 나오지 않겠나? 훈련 끝날 시간이 된 것 은 알고 있네." "단체 생활이라 혼자서 무단 이탈은 곤란해요." "좋아. 누구 한사람쯤 동반해도 양해하기로 하지. 보이프렌드도 좋고. 마틸라 호텔 커피숍에서 보기로 하지. 서로 가까운 곳이니까. 30분 후에 보자구. 자네 얼굴은 내가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탈가닥. 전화는 끊겼다. 쥬엘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 다. 파파라면 무시하고 나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 나... 쥬엘에겐 호기심과 모험심이 일었다. '보이프렌드도 좋고...'라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잠시후 쥬엘은 그리스의 방문을 노크하고 있었다. "그리스? 잠깐만요. 함께 외출할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인데, 그래? 나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다니 너답지 않은 걸." 그리스는 바짝 긴장한 것 같았다. 그럴만도 하다. 아무리 요즘들어 이 야기를 잘 한다고 해도 적이면 적이었지 결코 친구라고는 할 수 없는 사 이였으니까. "잠시... 누군가가 만나자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탈리아 사람이예요. 그 사람 영어 발음이 서툰 것 같아서, 그리스에게 통역이라도 좀 부탁할 까 하고요." 쥬엘이 완벽한 영국인으로서 생활하는 그리스에게 서슴없이 이탈리아어 통역을 부탁한 것도 억지는 아니었다. 유토피아와 그리스는 종종 이탈리 아어로 이야기 하곤 했던 것이다. 지난 번 6시간에 걸친 호된 기합을 받 은 뒤로 <꽤 친한 사이>가 되었기 때문에 맘 편하게 부탁해 본 것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리스는 <유토피아에게 부탁하지 그래> 라는 식의 촌스러 운 대답은 하지 않고 말없이 따라 나섰다. 쥬엘의 눈빛에서 어느 정도의 위험부담을 감지한 것이다. 쥬엘에게건 그리스에게건 유토피아는 상처하 나 없이 보전되어야만 하는 존재라는 점은 확실했으니까. 마틸라 호텔은 그다지 고급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 이근처에 호 텔이 있나요? 라고 사람들에게 물어서야 가까스로 찾을 수 있을 정도였 다. 해가 채 지지 않았는데도 어두워 보이는 3층 건물. 그리스와 쥬엘이 지하에 있는 커피숍에 들어서자마자 어떤 사람이 오른 손을 번쩍 치켜드는 게 보였다. "헤이, 이렇게 나와줘서 반갑구만. 자네도 반갑지?" 좋은 인상은 아니었지만 그다지 흉측한 얼굴은 아니었다. 별로 똑똑해 보이지는 않는, 하지만 놀고 먹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나쁜 짓도 서슴지 않는 그러한 타입의 사람으로 느껴졌다. "부르신 이유는요?" "보이프렌드인가?" 이탈리안은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턱으로 그리스 테일러를 가리키 며 되물었다. 순간 쥬엘은 가슴속이 뜨끔하며 순간적으로 코우치의 얼굴 이 스쳐지나갔다. "잘 생겼구만." 쥬엘이 대답이 없자 그저 기분좋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를 권한다. "이탈리아어로 말씀하셔도 돼요. 그리스가 통역을 해 줄 거예요. 보이 프렌드라기 보다는, 그래서 데려 온 거니까요." 쥬엘은 그리스를 흘긋 곁눈질로 보며 쌀쌀하게 내뱉았다. 그리스의 얼 굴에 짜증이 묻어났다. 심부름을 위해서만 데려온 듯하게 이야기 한 것이 그리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모양이었다. "그거 아주 좋지." 이탈리안이 서툰 영어를 마지막으로 내뱉고는 신나게 이탈리아어로 떠 들기 시작했다. "헤이, 사이먼 윌콕스가 보고 싶지 않은가?" "사이먼 윌콕스... 어디서 들은 이름 같기는 해요." 쥬엘은 인상을 찌푸리며 기억을 되새기고 있었다. 여기 있는 몸이 인상 을 찌푸리는 것과는 달리 언제나처럼 몸과는 따로 노는 그녀의 정신은 먼 옛날을 되새기고 있었다. 언제나 날 귀여워 해 주셨던 사이먼. 아버지의 회사 친구라고만 알고 있었다. <안녕하신가 미쓰 로슈? 이런 친구가 갖고 싶지 않았나?> 하며 커다란 인형을 불쑥 내밀던 그의 회색 콧수염을 기른 얼굴이 희미하게 생각난다. "그는 이제 곧 죽을 목숨이지. 별로 좋지 않은 병에 걸린 모양이라고들 하더군. 보면 알겠지만 꼭 시체같아. 아프리카로 <도망>갔던 일이 잘 안 된 모양이지. 부모형제도 없고 부인도 없는 그가 쥬엘 오스몬드를 찾아달 라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 않는가? 친딸처럼 귀여워 했었다면서." 쥬엘은 그리스가 영어로 옮겨줄 때까지 그냥 멍하니 있었다. 영어를 듣 고도 별로 표정에 변화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다만 머리속에서는 사이먼 이 어떻게 <이사벨라 로슈>가 아닌 <쥬엘 오스몬드>라는 이름을 알고 있 을까 하는 의문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나와 같이 가 보겠나?" "... 당신은 누구 편이지요?" "나? 전에는 꼬마 앨버트의 편이었지. 물론 지금은 디노의 편이고." "그리고 유토피아의 편?" 쥬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들릴듯 말듯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그리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새파랗게 질렸다가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하긴, 못되먹은 아메리칸 루코를 꼼짝 못하게 하고 루시오의 총애를 얻었 던 <밀라노-엘바>의 둘도 없는 영웅, 둘도없는 사기꾼 꼬마 앨버트와 신 시아 리코넬리의 아들이 디노를 모른다면야 말이 안 되지. "어때, 나와 같이 가 보겠나?" "어떻게 할래요, 그리스?" "대체 사이먼 윌콕스가 누군데 그래? 당신 아버지의 친구였다는 소리인 줄은 알겠는데, 어떻게 네가 여기 있는 것까지 알고 온 거지?" "글쎄요. 제가 아는 건 한 가지 뿐이예요. 사이먼 윌콕스는 적어도 말 많고 허풍스러운 이탈리아 사람은 아니라는 것." 쥬엘과 그리스가 함께 나간 이후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소 문을 야기시켰다. 합숙B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숙덕거리며, 그 둘은 원 래 서로 바라보는 눈초리가 수상했다는 둥, 쥬엘의 연습 때 꼭 상대편에 서 받아쳐준 것은 그리스였다는 둥, 지난번 그렇게 심한 기합을 준 것도 보통 사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둥 이상한 소문이 무성했다. 유토피아 역시 맘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럴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는데... 유토피아가 스매싱한 공은 맞은 편 코드에서 받아주고 있던 욜라 빙거 를 흠칫 놀라고 기죽게 했다. 유토피아와 함께 복식조라는 것이 다행이 야. 단식이라면 죽어도 유토피아를 이기지 못할 테니까. 크리스토퍼 프린스가 마리를 불러낸 것은 합숙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 가기 전날이었다. 저녁 놀에 반사된 마리의 머리는 못견디게 붉게 반짝이 고 있었다. 아름답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처럼 껴안아버리고 싶지 는 않았다. 훈훈한 느낌과 첫사랑의 여자라는 생각은 있었지만, 지금 크 리스토퍼의 머리속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은 쥬엘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무슨 일이예요, 크리스?" 급하게 뛰어나와서인지 마리의 볼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쥬엘이 없어졌어. 혹시 알고 있는 것 없나?" 크리스토퍼는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꺼내서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마리도 담배를 향해 손을 내밀며 무심한 듯 대꾸했다. "글쎄요. 그저께 돌아갈 때에만 해도 말짱했는데." "피에르도 아는 게 없다고 하더군. 지금 발칵 뒤집혔어." "피에르가 모른다고요? 그럴 수는..." "그러니까 궁금해 하는 거지. 위급할 때 보낸다는 넥타이핀으로부터의 전파도 없었다니까. 마리도 모른다니 그럼 대체 어떻게 된 걸까?" "혹시..." 마리의 목소리는 공포에 차 있었다. "뭔데 그래? 작은 단서라도 좋아. 말을 해 봐." "두 주일쯤 전에 파파의 집으로 쥬엘을 찾는 전화가 왔었어요. 사이먼 윌콕스의 친구라고 하더군요. 지독한 이탈리아식 영어여서 기억에 남았지 요. 전화 받자마자 대뜸 <거기 쥬엘(보석) 있지요? 나 사이먼 윌콕스의 친굽니다.> 하더라구요. 그냥 장난 전화겠거니 하고 허튼 소리 말라고 끊 어버렸지요. 사이먼 윌콕스 따위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요? 어떻게 번호를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쥬엘이 쥬엘 실버 오스몬드를 찾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군요." 사이먼 윌콕스라. 크리스토퍼는 자신이 쥬엘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 이 없다는 것을 통감했다. 그저 피에르 에드윈 P. 아담은 무엇인가를 알 고 있을 것이라는 데에서 위안을 얻을 수 밖에 없었다. 캐더린이 전화를 받은 것은 막 훈련을 마친 6시 무렵이었다. "전화 바꿨습니다." "캐더린 피킨즈양?" 외국인인가? 내 이름을 저따위로 발음하다니. "네, 제가 피킨즈입니다만..." 자, 받아봐라, 라는 소리가 전화기 저편에서 희미하게 들리더니, 곧 낯 익은 목소리가 귀를 울려왔다. "캐디?" "쥬엘? 정말 쥬엘이니? 거기 어디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절대 비밀이야, 캐디. 그걸 명심해 줘. 코우 치에게도 말해서는 안 돼. 말하면 난 죽게 될 지도 몰라. 난 잡혀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아무렇지도 않아. 곧 돌아갈 거야. 그리스 테일러도 여기 있구. 여기는 무슨 선착장 같은데, 잘은 모르겠어. 그냥, 별 일 없을 거 야. 내가 무사하다는 걸 알리고 싶었어. 그럼 영국에서 만나자." 탈가닥.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매정하게 들린다고 생각하며 쥬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위치를 말해버린 것이 불만인 듯 이탈리안이 뭐 라고 떠들어댔지만 상관없었다. 캐더린 피킨즈. 비밀을 <적당히> 지킬 줄 아는 아이. 그 애라면 <코우치에게도 말해서는 안 돼> 라는 말을 <코우치 에게만 말해야 돼>라고 생각해 줄 것이었다. 캐더린 피킨즈가 크리스토퍼 프린스의 방을 노크한 것은 크리스토퍼가 막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누르기 시작하려던 때였다. 파파에게 사이먼 윌 콕스에 대한 것을 물어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캐더린이 새파랗게 질 린 얼굴로 들어와 <쥬엘이...> 라고 울먹여댔을때, 크리스토퍼는 수화기 를 내던져 버리고 캐더린에게 다가와서 캐더린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똑 바로 말해 보라고 악을 써댔던 것이다. 선착장이라. 지금 중요한 것은 사이먼 윌콕스라는 사람보다 선착장이라 는 단어였다. 이 도시에서는 강변의 선착장은 전부해서 12군데뿐이다. 코 우치는 곧 합숙소내의 전산실로 달려가 선착장에 대한 정보를 탐색했고, 지금 이 붐비는 여름시즌에도 열지 않고 있는 곳은 보수 공사중인 제 2선 착장 한 곳 뿐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쥬엘의 예상은 대체로 맞았다. 캐더린은 코우치에게는 그 이야기를 하 지 않을 수 없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더 이야기를 했다. 낸시 스왈러에게. 도저히 혼자서 걱정하는 것으로서는 견뎌 낼 수 가 없었던 것이다. 크리스토퍼는 프랑스에서의 합숙동안만을 위해서 새로 산, 폐차 직전의 중고차를 몰고 주차장을 서서히 벗어났다. 그 때, 캐더린 피킨즈와 낸시 스왈러가 달려나왔다. 데려가 달라는 것이었다. 둘 다 얼굴이 새빨개지도 록 달려온 것이었고, 가뜩이나 더운 날이어서 땀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크리스토퍼는 차를 막고 서 있는 그들 때문에 괜히 시간 낭비를 할 것 없 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낸시 스왈러가 꽤나 수다스러운 소녀라는 것을 율 리아 로렌스로부터 들었던 기억이 나자, 망설임없이 그들을 태우고 달리 기 시작했다. 제 2선착장은 고요했다. 보수 공사중이라는 것은 말뿐으로, 공사를 맡 은 사람들도 모두들 휴가를 떠난 듯이 보였다. 크리스토퍼는 멀찍이 거리 를 두고 내려서 조심스럽게 건물을 향해 다가갔다. 캐더린과 낸시도 울퉁 불퉁하게 놓여있는 철근과 시맨트부대 등을 조심조심 뛰어넘어가며 부지 런히 크리스토퍼를 쫓아오고 있었다. 건물로부터 10미터 정도 거리까지 오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크리스토퍼는 낸시와 캐더린더러 몸을 숨기라고 이르고는 혼자서 건물로 향해 다가갔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크리스토퍼가 주먹질을 시작한 것으로부터 해서, 쥬엘이 포박을 풀고 일어선 것, 그리스를 풀어주자 싸 우기 시작한 것, 그들이 총을 쏘기 시작한 것, 밖으로 달려나왔을 때 쥬 엘을 보고 달려온 캐더린이 쥬엘을 밀쳐내 버리고 그 총알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 것, 그 머리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 것, 쥬엘이 정신없이 철근을 휘두른 것, 그리스가 표창을 던진 것, 이탈리아인 8명이 모두 쓰 러진 것까지! 그때까지도 낸시는 오돌오돌 떨고만 있었다. 쥬엘은 서둘러 캐더린을 부축해 안았다. 캐더린의 붉은 머리는 피로 온통 물들여진 채 막 지기 시 작한 노을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쥬엘의 옷도 금새 피투성이 가 되어 버렸다. "캐디! 캐디! 괜찮니?" "아, 쥬엘, 괜찮아. 그냥 좀 졸린 걸... 피를 너무 많이 흘렸나 봐..." "그래, 괜찮을 거야, 조금만 참아, 캐디. 곧 병원에..." "아냐! 난 아프지 않아. 병원에 가지 않아도... 쥬엘, 네가 다치지 않 아서 다행이야." 캐더린은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병원으로 옮길 필요가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저 그렇게 총알 하나가 캐더린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 었다. 쥬엘은 한순간 멍해졌다. 정말 싫어. 내가 <잘 아는> 사람이 죽는 다는 건. 쥬엘은 도리질을 했다. 그래, 지난번 디노로부터 돌아왔을 때 파파가 말했었지. 난 실습이 너무 부족해서 걱정을 많이 했다고. 훈련만 죽어라고 받았기 때문에 아무것에도 익숙하지 못하다고. 그래도 난 이렇 게 잘 살아왔지 않느냐고 웃어줄 수 있었는데. 아아, 정말 싫어. 내가 다 치지 않아서 다행이라니, 내가 대체 너에게 무엇을 해 주었길래, 캐디! 쥬엘의 얼굴은 어느새 아무런 느낌도 없는 무표정이 되어 있었다. 항상 그렇게 훈련받아왔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무엇인가를 느끼려고 하면 얼굴 은 항상 자동적으로 무표정이 되어 버렸다. 낸시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고, 그리스가 달래려하자 기절해 버렸다. 그리스와 크리스토퍼는 각기 팔과 어깨에 그다지 심하지 않은 부상을 입 고 있었다. 쥬엘은 말없이 캐더린을 들쳐 업었다. 코우치가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제가 데려가게 해 줘요. 나때문에 죽은 걸." 모든 처리는 파파가 잘 마무리 해주었다. 캐더린은 그저 길을 지나다가 공연한 싸움에 말려들어 총을 맞은 것으로 캐더린의 부모를 비롯한 모두 에게 알려졌다. 기절했었던 낸시는 자신이 꿈을 꾼 것으로 생각했다. 캐 더린이 위급한 상황에 빠지자, 다급하게 자고 있는 자신에게 텔레파시로 알린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일주일에 한번씩 꼬박꼬박 캐더린의 무덤엘 찾아가겠노라고 다짐하며. 다른 부원들이 영국으로 돌아간지 이틀이 지났다. 쥬엘도 내일은 영국 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D-데이가 얼마 남지 않아서 마지막 점검을 위해 파파의 집에서 이틀간을 더 머문 것이다. 파파의 집의 자기 방에서 쥬엘 은 샤워를 하고 잠옷을 갈아입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쥬엘? 영국입니다. 캐더린의 장례식이 오늘 있었는데, 무사히 잘 끝났 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 일은 신경쓰지 마십시오. 내일 다시 그곳에 가 서 D-데이에 대한 마무리 점검을 하기로 하지요. 별다른 일은 없습니까?" 파파의 목소리를 듣자 쥬엘은 말이 막혀버렸다. 사이먼 윌콕스를 만났 다는 얘기를 언제나처럼 담담하게 보고해 버리고 싶었지만 왠지 파파에게 는 아무런 얘기도 할 수가 없었다. 쥬엘은 알고 있었다. 사이먼 윌콕스에 대한 얘기를 파파에게 하기만 하면 곧 사이먼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여 지껏 파파에게 배워온 사고방식으로도 그것은 자명했다. 파파의 명단도 사이먼으로 인해 작성된 것이었고, 그것을 디노에게 넘긴 것도 사이먼이 었다. 그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앙드레 알베르 로슈를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 쥬엘은 조심스럽게 입안에서 아버지를 불러보았 다. 담담했다. 아무런 그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친구 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쥬엘은 그의 죽음을 막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 었다. 캐더린의 죽음이 자신을 이토록 변화시켜 버렸다는 것을 쥬엘은 입 술을 깨물며 자인할 수 밖에 없었다. 누구든지 내가 아는 사람이 죽는다 는 건 싫어. 아무리 를 위해서라고 해도. 쥬엘은 캐더린의 죽음 앞 에서 당연하게 행동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를 거북스러워하고 있었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괴로와하고 있었다. 더욱 괴로운 것은 파파에게까지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숨겨야 한다는 사 실이었다. 쥬엘은 파파를 사랑했고, 지난 12년간 무엇이든지 다 이야기해 왔었다. 그러나, 이제와서 그것이 조금씩 깨져가고 있는 것이었다. 쥬엘 실버 오스몬드는 그저 한마디만을 하고서 수화기를 내려놔 버렸 다. "아무 일 없어. 사랑해, 파파." 수화기 건너편에서는 한참동안 멍하니 앉아있는 피에르 애드윈 P.아담 이 있었다. "자, 다왔습니다, 쥬엘." 파파는 자기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는 쥬엘을 살며시 흔들며 말했다. "벌써?" 쥬엘은 부시시한 눈을 떴다. 이대로 더 자고 싶었다. "쥬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파파의 걱정스런 눈빛이 가까이에 있었다. 쥬엘은 이렇게 함께 편안한 기분으로 앉아 있어 본 적이 상당히 오래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 파파와 조금만 더 함께 있고 싶어." 쥬엘의 머리는 다시 파파의 어깨에 떨어졌다. "쥬엘. 공항에 다 왔습니다." 갑자기 사무적이 된 파파의 목소리에 쥬엘은 벌떡 깨며 잠바를 집어들 었다. "그럼, 영국에서."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는 차문을 열고 내리려는 쥬엘을 파파가 뒤에서 껴안았다. "미안합니다, 쥬엘. 조금 더, 조금쯤은 더 편안하게 해 드릴 수 있을텐 데." 쥬엘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쥬엘은 파파의 볼에 가볍 게 키스하고는 차에서 내려 문을 닫으며 기분좋게 외쳤다. "파파답지 않아. 그럼 영국에서 보자구. 굳바이!" 앨런 사모아 고등학교 테니스부에 다시 합류하기 위해 성큼성큼 공항 건물을 향해 걷는 쥬엘의 발걸음은 유난히 가벼웠다. PART 10. D-데이 하늘은 한껏 푸르렀다. 오늘부터 전국 고교 테니스 대회가 열린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쥬엘과 그리스는 함께 몸을 풀고 있었다. 유토피아 와 욜라빙거가 함께 몸을 풀고 있었기 때문에, 쥬엘의 짝이 되어 몸풀기 를 도와줄 여자부원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와는 정말 친해져 있었다. 그리스는 <밀라노-엘바>를 그다지 좋 아하지 않았고, 지난번 사이먼 윌콕스 건 때문에 쥬엘을 통해 를 알게 되자 를 무척이나 좋아하게 되었다. 유토피아와는 여전히 친 하게, 정답게 지냈지만, 유토피아는 왠지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는, 왠지 그리스가 자신보다 쥬엘과 더 잘 통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리스는 쥬엘과 통하는 부분이 많았다. 서로 아웅 다웅 하긴 하지만 왠지 어울린다고 앨런 사모아 고등학교의 모든 학생들 이 생각하고 있었다. 유토피아와 그리스가 어울릴 때는 자기의 일기장에 그리스의 이름을 써 내려갔던 수많은 여학생들이, 그리스와 쥬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서는 그 일기장을 미련없이 찢어버리곤 했다. 요즘의 그리스는 퍽이나 빛나 보이고 아름다왔다. 전의 날카로움이 없 어지고 한없이 밝게 웃는 모습이 젊음을 그대로 나타내주고 있었다. 그리스의 차례가 먼저였다. 대진표에 따라, 그리스의 경기가 끝날 때 쯤 해서 유토피아와 쥬엘의 경기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잘 해야 돼, 그리스." 라켓을 잡고 몇번 휘둘러보는 그리스 테일러에게 유토피아가 한껏 미소 지으며 외쳤다. "걱정 마, 유토피아. 미스터 유토피아의 화려한 플레이를 기대하라구." 모든 경기는 예상대로 착착 진행되어 갔다. 경기 첫날은 무난히 마쳤다 고 볼 수 있었다. 다음 날 오전에 복식 준결승전, 오후에 결승전이 있을 예정이었고, 셋째날에 단식의 준결승전, 결승전이 벌어질 예정이었다. D- 데이는 앞으로 이틀. 쥬엘은 수첩의 달력에 표시된 자그마한 붉은 동그라 미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와아, 안녕, 듀렌?" 쥬엘은 응원석에 와 있는 듀렌 테일러에게 손을 흔들었다. 듀렌은 잠시 머쓱해진 표정을 짓더니 돌아섰다. 자기딴에는 공들여 사로잡아 데려간 쥬엘이 무사히 살아나온 게 그다지 기분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스를 응원하러 온 모양이라고 맘편하게 생각하던 쥬엘의 눈에 듀렌 곁에 서 있 는 루엔 콜리의 모습이 눈에 띠었다. 수염을 달고 머리를 염색해서 언듯 첫눈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곧 알아챌 수 있었다. "안녕, 루엔!!" 쥬엘은 루엔에게도 소리를 질렀다. 루엔 콜리가 못 들었다는 듯이 돌아 서서 유토피아와 욜라 빙거의 경기를 관전하고 있었다. 결승전은 결승전 다웠다. 유토피아의 화려한 플레이도 주춤주춤 흔들리고 있다는 게 눈에 띌 정도가 되었다. 쥬엘은 상대편 코트에 있는 두 여자아이를 보았다. 파 파의 보고를 받기로는 6살 때부터 함께 복식조를 짜온 사이라고 했다. 호 주, 테니스의 왕국. 결국 모든 계획은 완벽한 건가? 오늘 복식에서 준우 승에 머물고, 내일은 결승전에 도착하지조차 못할테니. 쥬엘은 유토피아가 조금은 가엾게 느껴졌다. 먹이. 그래서 결코 진정으 로 좋아해서는 안 되는 사람. 고양이가 쥐를 사랑한다면 그 고양이는 결 국 굶어죽게 되거나 미쳐버릴 거라고 했다. 그래, 파파가 옳아. 진정으로 유토피아를 좋아하지 않기를 잘 한 거지. 쥬엘은 자신의 먹이를 다시 한번 보았다. 땀을 흘리고 있었다. "유토피아, 힘내요!!!" 쥬엘은 힘껏 응원을 하기 시작했다. 코트를 바꾸면서 유토피아가 쥬엘 을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누가 본다면 자신있는 미소라고 생각하겠지. 쥬엘은 씁슬한 생각이 들었다. 미소는 미소야. 그런데 얼어붙은 미소. 보 통 때의 유토피아의 미소는 아주 찬란하고 화려했었는데, 지금은 누구나 지을 수 있는 그냥 그런 미소야. 저렇게 떨고 있다니, 정말 유토피아가 지는 것일까?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로 한 번도 져 본 일이 없다는 유토피 아 피렌인데? 제 3세트 게임 스코어 6-6. 어드벤티지 룰이 적용되었다. 듀스로 계속 되어 질질끄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재작년부터 이 대회에서도 어드벤티 지 룰을 적용하고 있었다. 9점중 무조건 5점만 먼저 따면 이기는 경기. 쥬엘은 속으로 조바심을 쳤다. 듀스까지 가다니. 결국 유토피아가 강하긴 강한 건가? 결국 유토피아는 5-2로 지고 말았다. 욜라 빙거는 그저 시무룩하게 상 대편과 악수를 하러 네트로 다가섰지만, 유토피아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 었다. 저 모습을 사진이라도 찍어두고 싶군, 이라고 쥬엘은 생각했다. 완 전히 얼어붙은 얼굴. 창백하다는 표현이 차라리 맞을 것이었다. 1차 성공. 이제 내일 일만 남았다. 그때였다, 쥬엘은 가까스로 악수를 하고나서 입술을 깨물며 여자 탈의 실로 달려가는 유토피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괜찮아요, 유토피아. 진정해요." "응, 아니야. 다른 사람 앞에서라면 이렇게 울거나 하지 않아. 하지만, 너에게라면 조금은 기대도 괜찮을 것 같아서. 괜찮지?" "저야 물론 괜찮지만요. 하지만 예쁜 얼굴이 상해요." "상관없어. 그리스도 이젠 더 이상 날 생각해 주지 않는 걸 뭐." "왜 그렇게 생각해요, 대체? 그리스 테일러는 결국 미스터 유토피아예 요. 당신을 벗어나서는 존재 가치가 없다고요." "거 참 고마운 소리인걸." 뒤에서 그리스 테일러가 말했다. 비틀거리며 탈의실로 달려가는 유토피 아가 걱정이 되어서 바로 뒤따라 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 이미 쥬엘이 있었기에, 입술만 깨물며 분해 하고 있던 중이었다. 쥬엘도 물론 거기에 그리스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일부러 그리스를 앞으 로 나오게 하기 위해 그런 소리를 한 것이었다. "하긴 틀린 말도 아니지. 쥬엘이 잘 본 거야. 난 널 떠나서는 존재가치 가 없어, 유토피아." 그리스는 스스럼 없이 말했다. 유토피아의 볼이 붉어지는 것을 쥬엘은 놓치지 않았다. "남자가 어쩌면 그렇게 비낭만적이예요? 그런 소리는 단둘만이 있을 때 하는 거라고요. 유토피아의 볼이 붉어졌잖아요." "어, 정말이네. 하지만, 사실인걸. 꼭 낭만적이어야만 맛인가?" 유토피아는 그리스와 쥬엘이 토닥토닥하는 것을 보고 또다시 일말의 불 안감을 느꼈다. 이 둘은 너무 사이가 좋아. 내가 파고 들어갈 자리가 없 는 것 같아. 크리스토퍼 프린스는 상당히 속이 상해 있었다. 유토피아의 테니스는 물론 굉장한 수준이었고, 욜라 빙거도 유토피아를 상당히 잘 뒷받침해 주 었다. 컨디션에 따라 실력이 왔다갔다 하는 욜라 빙거였지만, 특히 오늘 욜라 빙거의 컨디션은 최고여서 충분히 우승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결국 져버리다니. 아무리 막상막하의 경기라느니 뭐니 해도 다 소 용없었다. 결국 진 건 진 것이다. 과정이 아무리 어땠던 간에. 크리스토퍼의 머리 속에는 잠시 파파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쥬엘 이 우승을 해야만 한다고 했지. 설마 유토피아를 우승하지 못하게 하려고 작정한 것은 아닐까? 상대편 선수들의 플레이는, 마치 프로 선수를 목표 로 오랫동안 훈련해 온 것 같았다. 설마. 영국에서라면 그런 선수가 아직 껏 알려지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그는 가지고 있던 자료를 뒤적여 상대편 선수들에 대한 자료를 발견했 다. "5월달에 호주 사우스 이스턴 고등학교에서 전학?" 드디어 D-데이의 날이 밝았다. 쥬엘은 운동복을 갈아입으며, 다시 한 번 오늘 있을 일을 머리속으로 검토해 보았다. 쥬엘의 머릿속에서는 모든 것은 너무 분명하고 결과가 확실했다. 유토피아가 준결승에서 져 버릴 무 렵, 파파는 안토니오 피렌에게서 유언장을 받아내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 고, 쥬엘이 결승전에서 우승을 해 버리고 나면, 완전히 무너져버린 유토 피아를 데리고 달아날 것이다. 한동안, 그래, 안토니오 피렌이 죽을 때까 지만. 안토니오 피렌이 암이라는 것은 극비였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그 사실을 입밖에 내기를 두려워했었다. 가장 최근 의 정기점검에 의하면, 이제 길어야 두달 남은 생명이라고 했다. 그래도 아직 흔들리지 않고 회사를 제대로 운영해 내고 있으니, 그건 비서진이 훌륭하다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쥬엘은 가볍게 몸을 풀고 테니스 라켓을 쥐어보았다. 아주 가뿐하게 잡 혀왔다. 컨디션은 만점이었다. 파파는 성공할 것이다. 파파가 유서를 받 아내는 데에만 성공하면,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이다. 그리고, 파파는 실패 를 모르는 사람이다. 쥬엘은 경기장에 나가서 유토피아를 보았다. 유토피아의 눈이 붉게 느 껴져서 섬뜩 놀랐다가 다시 유토피아를 보니 온화한 표정을 되찾고 있었 다. 절대로 지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듯 했다. 만에 하나 유토피아가 결승전에 올라온다면, 내가 그녀를 물리쳐야 하 는데... 그래도 그녀가 날 믿어줄까? 잠시 쥬엘의 머리에 혼란이 왔다. 잠시 망설이던 쥬엘은 <믿어줄 것이다.>라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다 만, <그리스가 없다면...> 이라는 조건이 자꾸 생각나는 것을 억지로 떨 어버리려 하면서. 준결승전에서의 유토피아는 그야말로 자신만의 화려한 플레이를 맘껏 펼쳐보였다. 상대방이 기가 질려서 라켓을 제대로 못 휘두를 지경이었다. 실력 이전에, 정신력과 기세가 상대방을 짓누르고 있었다. 단순히 이기기 위한 시합이 아니었다. 한 구 한 구에 온 정열을 투자하고 있지 않다면 그러한 멋진 에이스와 스피드 볼이 나올 수가 없었다. 관객석에 앉은 사 람들 모두가 감탄하고 있었다. 쥬엘은 서서히 긴장하기 시작했다. 호주에 서 프로를 목표로 하는 애들이라고 해 봤자 어림도 없어. 호주에서 프로 를 목표로 하는 애들은 영국에서의 보통 고등학교 테니스 부원들만큼 많 을테니까. 특별히 재능이 있다기 보다는, 그저 남들보다 조금 열심히 연 습해온 애들일 뿐이야. 게다가 이름이 전혀 안 알려져야 되니까 조금쯤 실력이 뛰어난 애들을 쓸 수도 없는 거고. 6살 때부터 10년도 넘게 함께 짜온 복식조가 호흡을 맞춘지 6개월도 안되는 욜라빙거와의 복식팀을 가 까스로 무너뜨렸을 정도이니. 쥬엘은 불안해져 왔다. 그동안은 유토피아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거라 고 생각해 왔지만, 지금 혼심의 힘을 다하고 있는 유토피아의 화려한 플 레이를 보고 나자 확신이 없어져 버렸다. 쥬엘은 잠시 파파의 생각이 났다. 이겨야만 해. 무조건. 이것이 의 일원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첫번째 임무야. 심판이 준결승에 진출하라 고 쥬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마리 그랑디에는 관객석 제일 뒷자리에서 쥬엘의 경기를 보고 있었다. 준결승전은 무난히 이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은 프로근성이 지독한 아이라서 초반에는 쥬엘이 고전을 했지만, 지금은 상대방의 약점 을 완전히 간파하고 있어서 거의 쥬엘의 페이스였다. 마리가 이젠 됐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곁의 빈자리에 누군가가 와서 앉았다. 마리는 돌아다 보고 흠칫 놀랐다. "안녕한가요, 무슈 아담." "그래, 코우치는 괜찮았던 모양이로군." 파파는 스코어판을 흘깃보고는 다시 쥬엘의 모습을 쫓았다. "가셨던 일은 잘 됐나요?" 파파는 대답없이 그저 미소만 지었다. "하긴, 이니까." 마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게임이 꽤 오래 끄는군." "초반에 저애가 악착같이 달려드는 바람에 고생을 좀 해서 그래요. 그 나마 날씨가 선선해서 다행이지, 여름 같으면 벌써들 쓰러졌을 걸요." 마리가 토라진 듯이 얘기하자 파파는 낮게 웃었다. 뭐가 저리도 재미있 을까? 마리는 괜히 짜증이 났다. "여름이었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상대방은 쓰러져도 쥬엘은 괜찮아. 쥬엘이니까." 파파의 말에서 이상한 다정스러움을 느끼고 마리는 놀라서 파파를 돌아 보았다. 저 사람이 저렇게 따뜻하게 말할 수가 있다니. 마리는 파파의 옆 모습을 보고 그야말로 경악을 했다. 저것이 그토록 오만하고 냉철한 피에 르 에드윈 P.아담이란 말인가? 믿을 수가 없었다. 쥬엘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는, 누군가를 진정 사랑하지 않 고서는 보일수 없는 표정이었다. 마리는 문득, 마음속에서 질투가 피어오 르는 것을 느꼈다. "쥬엘을 사랑하나요?" 마리의 물음은 냉혹한 것이었다. 파파의 얼굴이 굳어졌다. "당신이 그런 눈으로 누군가를 바라볼 수 있다는 걸 지금에서야 알았네 요. 쥬엘한테만 그런 다정한 표정을 짓는 건가요?" "어떤 대답을 듣고 싶은 건가?" "쥬엘을 사랑하느냐고 물었는데요?" "물론 쥬엘을 어떤 의미로는 쥬엘을 사랑하지. 하지만 당신이 지금 생 각하고 있는 것과는 아주 달라, 마리. 를 그토록 오래 대해오면서 도 모르나?" "알아요! 알구말구요! 앙트와느를 비롯해서 의 멤버들은 너무도 냉혹하고... 그래요, 진저리가 날만큼 냉정하고 감정이 없지요. 하지만, 당신이 쥬엘을 바라보는 모습은 그런 냉혹한 모습이 아니예요! 그냥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모습이라구요!" 마리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자, 파파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 랐다. 순간적으로 그는 마리가 왜 우는 지에 관해 혼란을 느꼈다. "왜 울지?" 파파의 한쪽 눈썹이 치켜져 올라갔다. "... 분해서요." 마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이제 경기가 끝나면 제게 섬을 주시기로 한 것은 주시겠지요? 그 섬에 나 가서 좀 쉬어야겠네요. 너무 지쳤어요." "물론 주지. 하지만, 나에 대해서 오해는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오해라구요? 길을 막고 물어보세요. 그렇게 다정한 표정은... 한번이 라도 나에게 그런 얼굴을 한 적이 있다면..." 마리는 고개를 돌리고 일어서려했다. "아니예요. 가겠어요." 파파는 마리의 손목을 붙잡더니 낮은 소리로 소리내어 웃었다. "지금 질투하는 거야? 날 사랑하나?" 마리는 한동안 말도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린 채로 있다가 파파를 노려 보기만 하다가, 가까스로 자포자기한 듯이 내뱉었다. "그래요, 사랑해요. 이 냉혹한 남자를." 마리는 있는 힘껏 그를 노려보았다. 이 말은 사실이었다. 파파는 그녀 가 지금까지 대해온 어떠한 남자와도 달랐다. 편하게 대할 수도 없었고, 그녀쪽에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었다. 그녀의 고집이건 뭐건 완전히 무시되었고, 파파가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앙트와느 그 랑디에도, 크리스토퍼 프린스도 그녀를 이렇게 만들지는 못했었다. 확실 히, 그녀에게 있어서 이런 감정은 생소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감정 외에는 어떤 것도 감히 <사랑>이라고 이름 붙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 던 것이다. "나갈까?" "?" 파파의 말에 마리는 의문 스럽게 쳐다보았다. "쥬엘의 결승전이 끝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아. 내가 일 처리를 좀 일찍 한 모양이지?" 파파가 먼저 일어서자, 마리도 따라 일어섰다. 이래서야 더 이상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속으로는 <먼저 달아났어야 하는 건데>라고 분해하며, 파파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지요?" 마리가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묻자 파파는 한눈을 찡긋하며 따뜻한 미소를 지어서 마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키쓰할 수 있는 곳으로." 이겼다. 쥬엘은 비로소 이겼다는 것을 자각하고 몹시 기뻤다. 건 뭐건, 아무래도 좋았다. 상대가 유토피아이건 누구건 전혀 상관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는 상대방에게 이겼다는 사실 한가지만이 쥬엘의 마음에 꽉 차 있 었고, 그 사실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힘든 경기였다. 정말 힘든 경 기였지만, 어쨌든 이긴 것이다! 기쁨이 한순간 지나가자 쥬엘은 비로소 네트 건너의 유토피아를 바라다 볼 여유가 생겼다. 유토피아는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을 하고 그 자리 에 주저앉아 있었다. 도저히 보통때의 유토피아로서는 보일 수 없는 그러 한 표정이었다. 쥬엘은 문득 제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유토피아를 구슬러서 쥬엘을 따 르도록 만들어야 할 때인 것이다. 쥬엘은 네트 앞으로 다가가 유토피아를 향하여 손을 내밀었다. 시합이 끝나면 의례적으로 하는 악수였다. 유토피 아는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네트로 다가왔다. 그리고 힘없이 쥬엘의 손을 잡자, 관객석에서는 다시한번 박수가 터져나왔다. "축하해, 쥬엘." 힘없는 미소였지만, 그다지 기분 나쁜 미소는 아니었다. "정말 아까와요. 최선을 다해줘서 고마와요." 쥬엘은 유토피아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 심판에게 가서 인사를 하자, 심판도 웃으면서 인사를 받았다. "정말 좋은 경기였어. 난 올해도 당연히 유토피아가 이길 줄 일았는데, 이제야 맞수가 생겼군." 유토피아는 경기장을 나오자, 쥬엘이 깜짝 놀랄 정도로 자신있는 표정 으로 당당하게 탈의실을 향해 걸어갔다. 샤워를 하면서 쥬엘은 곁의 유토피아를 흘끔흘끔 바라보았으나, 유토피 아는 당당하고도 무표정하게 샤워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쥬엘은 왠지 불 안했다.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어왔는데, 지금의 유토피아의 모습은 쥬엘을 자신없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감히 말을 걸 수도 없었다. 왠지 접근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유토피아가 샤워 장을 나서자, 쥬엘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랐다. "유토피아? 괜찮은가요?" "뭐가? 왜 그래, 쥬엘?" 유토피아는 미소를 지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우아하고 눈부신 미소였 다. "어제와는 너무 달라서요. 솔직히, 어제는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후후, 괜찮아. 속은 좀 상하지만, 내가 실력이 딸려서 진 건데 뭘. 최 선을 다했는데도 졌으면 할 수 없는 거지, 뭐. 그게 운동선수의 기본자세 아니야?" "하지만 어제는..." "어제는 속 상한 것보다도 너무 당황해서 그랬었나 봐. 져 보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었거든. 바보같이 굴어서 놀랬지?" 확실히 유토피아는 유토피아다. 어제의 그러한 행동이 순간적인 실수였 다고 생각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유토피아, 그게 원래의 당신이었어요. 지금은 바보같이 연극을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해요. 지금은, 그래요, 안토 니오 피렌의 딸로서 행동하려 하고 있는 것 뿐이예요. 어제 듀렌 테일러 가 뭐라고 나무라기도 했나보지요? 안토니오 피렌의 딸로서 너무도 당당 하지 못하다고? "이제 어딜 갈 계획이예요?" "코우치가 우리 선수 전원에게 저녁을 산다고 했잖아? 가서 잔뜩 먹고 속상한 걸 풀어버려야지 뭐." "그 후에는요?" "그 후에? 글쎄? 집에가서 쉬어야지. 별 다른 생각 안 해봤는데?" "유토피아, 내일은 토요일인데, 잠시 쉬러가지 않겠어요? 섬으로." "섬?" "예. 섬이요. 그냥 섬. 아주 좋은 곳이예요." "거기 누가 살지?" "우리 아버지요." "돌아가시지 않았나?" 유토피아가 의혹이 가득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진짜 아버지... 친아버지는 살아계세요. 이건 저랑 아버지밖에 모르는 사실이지만." "돌아가신 건 양아버지라는 거야? 하지만, 친아버지가 살아계신데 왜..." "세상에는 가족이 함께 살 수 없는 경우가 생각보다 훨씬 많은가 봐 요." 유토피아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리스가 간다면..." "물론 그리스도 갈 거예요. 유토피아가 가는 곳인데 안 가겠어요?" 유토피아는 비로소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웃으며 농담까지 한 마디 뱉을 수 있었다. "그리스를 데려가고 싶어서 날 가자고 그러는 것 아니야?" 저녁식사는 무사히 끝났다. 코우치는 우승을 한 그리스와 쥬엘에게 수 고했다는 말이 한 번 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코우치가 그 말을 할 때 유토피아의 낯빛이 약간 변하는 것을 쥬엘은 놓치지 않았다. 아직은 자기 아닌 남이 우승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아직은 맘에 빈 구석 이 있다는 거야. 파파에겐 이미 표를 석 장 부탁해 놓았다. 그리스 테일 러가 점점 의 일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는 것이 그리 내키진 않았지 만,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유토피아와 그리스를 따로따로 생각할 수는 없 었다. 레스토랑 앞에서 헤어지고 나자, 우연히도 크리스토퍼 프린스와 쥬엘은 같은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 물론 그리스와 유토피아도 같은 방향이었다. 쥬엘은 이렇게 크리스토퍼와 단둘만이 있게 되는 것이 싫었다. "우승했으니. 목표를 이룬 셈이군. 이젠 작전은 끝난 건가?" 좀 걸어서 사람이 드물게 되자 코우치가 물었다. "작전이 끝나다니요? 이제야 비로소 시작인 걸요." "이제야 시작이라구?" "더이상은 말 할수 없어요, 코우치. 뭔가가 더 알고 싶다면, 파파에게 전화해 보세요. 난 더 이상 말 할 수 없으니까." 쥬엘은 입을 꽉 다물어 보이고는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안토니오 피렌의 사망 기사는 유럽 모든 신문의 경제면 제일 첫머리에 커 다랗게 실려있었다. 모두들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아직도 안토니오 는 정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토니오 피렌은 경제계에서는 단 순히 엄청난 부자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유럽 경제를 손아 귀에 쥐고 있는 사람일 뿐더러, 거의 신화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어쨌든, 그는 죽었다. 폐암으로. 아직도 암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병이 지상에서 없 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통탄할 만한 일이었다. 그의 유언장은 영국인 변호사 제임스 스프링필드와 몇몇 친척이 나선 자 리에서 극비리에 공개되었다. 행방불명이 된 유토피아 피렌이 불참한 채로. 그리고, 거기 적힌 틀림없는 필적과 함께 변호사가 읽어내린 내용에는, 전 유산을 올해 영국에서 열린 고교 테니스 전국대회의 여자 단식 우승자에게 물려준다고 되어있었다. 미시즈 피렌이 말도 안 된다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파파의 작전은 완벽했던 것이다. 그동안 쥬엘은 유토피아와 그리스와 마리와 함께 이탈리아 남부의 아름다 운 작은 섬에서 휴가를 보냈다. 감히 '즐겼다'라고 할 수는 없는 휴가였다. 초긴장 상태였던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들 한껏 맘편해 보였다. 실 제 맘 편한 사람도 있기는 했다 -- 그리스 테일러라는 사람. 그리스는 모든 사심을 버리고 그저 유토피아를 마음껏 사랑하기로 한 것 같았다. 유토피아 는 형태야 어땠든 자신이 납치당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우울해 했지 만, 그리스와 함께 있을 때면 가끔씩 눈부신 웃음을 보이곤 했다. 쥬엘은 그러한 유토피아와 그리스의 모습을 보며, 그 둘은 재산 따위는 아무런 상 관없이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럴 때면 가슴 한구 석이 뜨끔하며 코우치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곤 했다. 마리 그랑디에는 줄곧 시무룩해 있었다. 섬으로 출발할 때부터 그랬다. 며칠 지난 뒤 그 섬이 자신이 받을 섬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도 그다지 반가와 하지 않았다. 마리의 귓가에는 파파의 목소리만이 맴돌고 있었다. -- 는 아무도 진정으로 사랑하지는 않아. 물론 사랑하는 척 할 수 는 얼마든지 있지만. -- 앙트와느도 늘 그런 식으로 말했었지요. 하지만, 그래도 인간은 인간 이잖아요. 게다가... 당신은 쥬엘을 사랑하잖아요? -- 그래. 하지만, 당신이 날 사랑하는 것과는 질이 다르지. 적어도 난 쥬 엘에게서 무언가를 바라는 것은 아니니까. -- 엉터리! 그건 마찬가지예요. 나도 뭔가를 바라는 것은 아니예요. 그저 당신이 좋을 뿐이예요. -- 그럴까? 그렇다면, 내가 당신 눈앞에 없어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겠어? -- 물론이예요! 얼마를 떨어져 살건 나는 당신의 일부로서, 당신만을 생 각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을 거예요! -- 그래? 그렇다면 좋아. 오늘 저녁 쥬엘은 유토피아와 함께 이탈리아로 갈 거야. 그런데 아마 그리스 테일러도 가게 될 것 같군. 당신이 도와줘야 겠어. 쥬엘과 함께 섬으로 가서 유토피아를 지키는 거야.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파파의 말 한 마디에 꼼짝없이 여기까지 와 버 린 것이 억울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파파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분 명했고, 공연히 쥬엘이 미워졌다. 그 마음을 터무니 없는 것이라고 억누르 며 마리는 하루하루를 버티어 나가고 있었다. 안토니오 피렌의 사망기사를 신문에서 읽고 나자, 비로소 쥬엘은 파파에 게 전화를 했다. "쥬엘? 이제 돌아오셔야지요. 유토피아는 건강합니까?" "이제 유토피아는 어떻게 되지?" "계속 학교를 다닐겁니다. 그리고, 안토니오가 이미 유토피아의 명의로 바꿔 놓은 재산이 꽤 되니까, 지금까지와 별 차이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겁니 다." "유토피아가 제일 아쉬워 하는 것이 뭔지 알아?" "뭡니까? 절 비난하는 말투로군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 파파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한마디만 하고 끊어버렸다. "지금 곧 돌아오십시오, 쥬엘. 오늘 밤 8시 런던행 비행기를 예약해 놓았 습니다." 런던에 도착하자 유토피아는 그리스 테일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쥬 엘은 마리 그랑디에와 함께 아파트로 향하며 이제는 아버지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이먼 윌콕스에 의하면, <밀라노-엘바>의 손아귀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그는 사람의 발자욱이 닿지 않는 아프리카 어느 곳엔가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이먼 윌콕스 는 재작년까지는 그와 함께 있었으나, 더 이상 견딜수가 없어서 이탈리아 로, 그리고 디노의 지시를 받아 다시 프랑스로 옮겨온 것이라고 했다. 순수 한 미국인. 쥬엘의 아버지 앙드레 알베르 로슈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건너간 미국인이었지만, 사이먼은 태생부터가 그저 미국인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 는 디노와 오랜 친구이기도 했던 것이다. 무명의 과학자 디노 레콘이 젊은 시절 미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에, 공원에서 만나 함께 이야기 하기를 즐겼 던 어린 친구들 중에 제일 친하게 지냈던 꼬마가 사이먼 윌콕스였던 것이 다. 제일 억울해 한 것은 디노 레콘이었다. 안토니오를 죽이고 유토피아를 보 좌하여 유럽 경제를 휘둘러보겠다던 그의 생각은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이 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좋은 점은 있었다. 미시즈 피렌이 그에게로 돌아온 것이었다. 하긴, 가난뱅이 생활에 길들어 있지 않은 그녀, 결국 디노를 사 랑하면서 돈 때문에 안토니오에게 갔던 그녀가 돌아온 것은 뜻하지 않게도 디노의 뜻대로 되었던 것이다. 안토니오를 죽일 계획을 세우면서 그녀가 돌 아오지 않을까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순수하게 남의 힘으로 그녀를 다시 얻게 된 것은 디노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따르릉 - . 전화벨이 울리자, 짐을 싸던 마리 그랑디에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쥬엘은 읽던 책에서 고개를 들어 마리를 바라보았다. 마리의 얼굴이 홍조 를 띠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시무룩해 지며 쥬엘에게 수화기를 건네주 었다. "쥬엘?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아, 파파였구나. 물론이야, 파파. 뭐 별다른 소식은 없어?" "좀 안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무슈 앙드레 알베르 로슈가 죽었어요. <밀 라노-엘바>의 짓으로 밝혀졌습니다만." "그래? 정말이야?" 별다른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 막막한 느낌이 다가오긴 했지만, 슬픔이 라던가 아쉬움이라던가 하는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 리라 생각했던 것이었다. 사이먼 윌콕스가 자신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확인 한 이상, 디노가 아버지를 내버려 둘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 었다. 한 가지 더, 의 멤버로 교육을 받기 시작할 때부터 쥬엘은 아버지 의 죽음을 예상하고 살아왔던 것이었다. 원하는 일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해야만 한다. 그리고 어떠한 희생을 당해도 까딱없이 버티어 나가야 한다. 적어도 는 그래야 한다. 그것이 쥬엘이 교육받아온 방 식이었다. 자퇴서류를 내러 앨런 사모아 고등학교에 갔을 때, 쥬엘은 크리스토퍼 프 린스와 마주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 쥬엘. 이번 일은 정말 굉장했어. 그러한 목적으로 전학을 온 줄은 몰랐었지.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학교를 그만두는 건가?" "그래요." "어디로 갈 거지?" "글쎄요. 아마 미국으로 가겠지요. 다음 일이 무엇인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니까. 파파는 아무런 할 일도 정보도 없을 때엔 미국에 있기를 좋아 하니까." "무척 당당하군." "그래요." "캐더린이 죽은 것은 벌써 잊었나?" 순간적으로 쥬엘의 얼굴이 굳어졌다. "코우치와는 상관없지 않아요?" 쥬엘은 가슴이 아파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항상 쥬엘을 따르던 캐더린의 모습이 생각났다. 이상하게도 이 사람 앞에서는 무감정하게 있기가 힘들었 다. 의 멤버답지 않게, 모든 것을 보다 인간적이고 감정적으로 보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미국이라. 나도 미국으로나 가 버릴까?" "코우치가 왜요?" "이곳이 지겨워졌어. 그리고, 네가 있는 곳이라면 뭔가 생활이 재미있을 것 같은데?" 코우치가 웃었다. 쥬엘은 잠시 코우치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돌아서 며 중얼거리듯이 말해버렸다. "사표 써 두세요. 함께 가요." 모든 재산 상속이 끝나고, 그 재산을 다시 에게 양도하고 나서야, 쥬엘은 비로소 파파의 집으로 돌아갔다. 언제나처럼 파파의 집에서 맞는 아 침은 쥬엘을 기분좋게 했다. 쥬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어둡게 한 건, 이제 이 집에서 지낼 일이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이었다. 또한,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야만 한다는 압박감이었다. 생각은 충분히 했다. 모든 것을 철저하게 검토해 보았으나, 결국 한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조깅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쥬엘은 식당으로 갔다. 언제나처럼 파파 는 식탁 한가운데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쥬엘은 파파의 옆으로 가서 앉아 파파를 불렀다. 오늘은 말을 하고야 말리라고 이를 악물고 있었다. "파파" "왜 그러십니까, 쥬엘? 안색이 안 좋군요." "난 떠나야겠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쥬엘?" "알아, 알고 있다구. 난 우리측 유일의 여자이고, 앞으로 내가 할 일이 산더미 같다는 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내가 해야 할 일이 계속 이러한 일이라면, 견딜 수 없을 거야." "무엇이 문제입니까, 쥬엘?" 파파의 말투가 싸늘하게 변해있었다. 쥬엘은 이를 앙다물었다. 오늘은 그 냥 물러서지 않을 거야. 파파의 말투가 싸늘해 지면, 쥬엘은 항상 잘못을 자각하고 냉정한 의 일원으로 돌아가곤 했었다. 하지만 이젠 싫어! "문제는, 난 이런 일을 하기엔 너무 감정적이라는 거야." "아니오, 당신은 감정적이지 않습니다." "파파는 몰라! 내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는 것이 얼 마나 힘든지를!" "예를 들면?" "캐더린 피킨즈가 죽은 것." "또?" "낸시를 속인 것" "그리고?" "유토피아의 불행." "또?" 쥬엘은 말이 막혔다. "한 가지만 더 댄다면 당신을 이해해 보도록 하지요. 그러나, 제가 알기 로는 그밖에는 당신의 마음을 괴롭힐 만한 이유가 없는 것 같은대요." 파파는 확실히 냉혹해. 쥬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유감이지만, 두 가지가 더 있어, 파파." "한 가지는 알만 하군요. 미스터 앙드레 알베르 로슈의 죽음. 그건 의 탓이 아닙니다. 디노 레콘이 한 일입니다. 이번 안토니오 건이 그 의 자존심을 무척이나 상하게 했기 때문에, 그는 견디지 못하고 그를 죽인 겁니다. 사실 훨씬 오래전에 잡혀갔던 목숨이었는데, 오래 버티어 온 셈이 지요. 또 한가지는 뭡니까?" 파파는 태연히 커피잔을 들어올렸다. 쥬엘은 잠시 망설였다. 말해 버려도 괜찮을까? 그러나 이젠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내뱉어버렸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어." 쥬엘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커피잔을 들어올리던 파파의 손이 공중에서 멈추더니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누굽니까, 상대는?" 파파의 목소리는 냉정했지만, 쥬엘은 왠지 파파가 두려워졌다. 대답을 하 면 그 상대방이 누구이건 간에 그를 죽여버릴 것 같았다. 쥬엘은 파파가 다 시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겠어." "그리스 테일러인가요? 한동안 너무 사이가 좋다 했습니다." "그리스 테일러? 하하. 말도 안 돼, 파파. 날 그렇게도 모르고 있어?" 파파의 얼굴이 무섭게 경직되는 것을 쥬엘은 보았다. 그런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쥬엘은 스스로 움츠러드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다잡으며 파파를 노려보았다. 쥬엘은 알지 못했다. 파파가 화를 낸 것은 <날 그렇게 도 모르고 있어?>라는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는 것을. 파파는 쥬엘에 대해서 만큼은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러한 믿음이 산산조각이 나 버렸던 것이다. 이윽고 입을 뗀 파파의 목소리는 이를 가는 것처럼 들렸다. "저로서는 전혀 모르겠군요. 말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쥬엘 실버 오스몬 드?" "제발, 날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아 줘, 파파.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파파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라구!" 파파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이윽고 못 견디겠다는 듯이 웃기 시작했다. "왜 웃는 거야, 파파?" "내가 당신이 사랑해 주길 바란다고 생각했습니까?" "물론, 그건 아니야. 하지만, 날 파파를 사랑해.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파파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양손을 깍지껴서 탁자위에 놓았다. 그 손이 쥬엘의 눈엔 엄청나게 커 보였다. "그런데 무엇이 문젠가요?" "누군가,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만 보면 마음이 움츠러 들어. 그런 느낌은 정말 싫어. 그리고, 그 사람 곁에 있으면, 내가 살아있는 인간, 피 가 통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고 말아. 감정을 억제할 수가 없어. 별것 아닌 일에 슬픔과 기쁨이 느껴지기도 하고. 이 이상 모든 일에 냉정함 을 유지한다는 건 불가능해." "다시한번 묻겠습니다, 쥬엘. 그 사람이 누굽니까?" "죽이지 않을 거지?" "약속하겠습니다. 손가락 하나 대지 않기로." "크리스토퍼 프린스야." 파파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 고 쥬엘은 생각했다. "비웃지 말아줘, 파파. 파파는 이런 마음 모를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건 아십니까? 당신은 정상적인 결혼 생활 을 못합니다." "물론 알고 있어. 난 자식을 낳을 수가 없지. 13살 때 <귀찮게 애기 같은 거 못 낳게 하는 수술>을 받은 기억이 생생한 걸. 그게 내가 받은 최초의 수술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떠나시겠다는 겁니까?" "응. 난 어차피 결혼같은 건 생각 안 해. 다만, 의 일원으로 지내 기엔 너무나 힘들다는 거지. 난 떠날 거야. 파파를 때려눕히고라도 달아나 겠어. 완벽하게 숨어버릴거야." 파파가 오랜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은 언제나처럼 아름다왔다. 쥬엘은 마 음이 아파왔다. 파파를 떠나서 살 수 있을까? 파파가 비로소 다시 쥬엘을 바라보더니 사무적으로 말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비행기표를 끊어드리지요." 크리스토퍼 프린스와 쥬엘 실버 오스몬드는 노스웨스턴 항공사의 뉴욕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쥬엘의 짐은 반년 전 뉴욕에서부터 올때 가져온 그 여 행가방 하나뿐이었고, 크리스토퍼의 짐도 비슷할 정도로 단촐했다. 쥬엘의 마음은 크게 부풀어 있었다. 고향으로 -- 태어나서부터 6살까지 아버지와 함께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은 분명 가슴벅찬 일이었다. 굳이 코우 치와 함께가 아니더라도. 파파가 날아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면서 한없이 아쉬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쥬엘은 알지 못했다. 피에르 에드윈 P.아담은 파파의 집 서재에 앉아 쥬엘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두려워 하는 것은 쥬엘과의 헤어짐이 아니었다. 쥬엘을 떠나보냈지만, 결국 그녀가 되돌아오지나 않을까 하고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또 그러고 앉아있나?" "아, 앙트와느. 잘 지내나?" "그럼. 마리가 안부전해달라더군. 이젠 자네를 안 보기로 했대. 와 는 아주 인연을 끊겠다나. 이젠 여자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고생깨나 하겠 어. 쥬엘도 없는데 마리마저." "그래. 어쨌든, 난 당분간은 일을 벌일 생각이 없어. 나에게도 휴가가 필 요해." "자네가?" 앙트와느가 놀라서 파파를 쳐다보았다. 원래 핵심멤버들은 한가지 일이 끝나면 두주일간의 휴가를 갖곤 했지만, 파파는 한번도 쉰 적이 없었던 것 이다. 쥬엘과 함께 있는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원래 <휴가>라는 것을 즐기 는 편이 못 되었던 것이다. "응. 여행이나 해야겠어." "뉴욕으로?" 앙트와느가 싱긋 웃으며 눈을 찡긋했다. "농담 아냐. 아시아쪽으로 가 볼까 해. 세계를 돌아다닐 만큼 다녔지만, 아직 아시아쪽은 별로 못 가봤거든." 파파는 서랍에서 책으로 만들어진 대형 세계지도를 꺼냈다. "어디... 여기로 가볼까? 한국에? 국내전의 참상을 딛고 일어선 나라라는 데. 항상 시련을 딛고 일어난 나라는 아름답지." "시련을 딛고 일어난 사람이 아름답듯이 말이지?" 앙트와느가 다시 웃었다. 피에르는 루루의 방으로 통하는 전화를 들고 말했다. "루루, 서울행 왕복 비행기표 예약을 부탁해. 대한민국의 서울말야. 가능 하면 내일 오후에 출발하는 걸로. 그리고, 내일부터 두주일간은 난 <휴가> 로 해 뒀으면 좋겠어."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루루의 목소리가 퍽이나 편안하게 들려서 파파 는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예, 알겠습니다, 피에르. 휴가 잘 보내세요." ----- 끝 ----